불갑사를 붉게 물들인 상사화는 슬픈 전설속 이야기
불갑사를 붉게 물들인 상사화는 슬픈 전설속 이야기
  • 영광21
  • 승인 2010.1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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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영광불갑산상사화축제 기념 시·수필 인터넷공모전 수상작
다시 한 번 빗소리가 귀를 울린다. 가락의 장단이 어우러지듯 빗소리도 크게, 작게 어우러지고 있다. 선풍기의 기계음이 생뚱맞은 곳 불갑사.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내 맘이 평안해지고 치유되고 있다. 다시 살아갈 힘이 샘솟는다. 마라난타와 지파사이야기를 상사화로 접목을 시키려고 한다. 마라난타, 지파사. 누군가는 피를 토하듯 상사화가 되어야 한다. 그 대목 앞에서 잠깐 망설여진다. 절에서는 상사화를 다른 말로 피안화라고 부른다고 했다. 피안의 세계로 들어서는 꽃이라고 했다. 피안의 세계. 피안의 세계에 머무는 스님들은 평안해 보였다.

스나와 마라난타의 결혼식이 다가왔다. 마라난타는 애가 탔다. 이 모든 것이 지파사를 위한 일이었다. 지파사를 부르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보고 싶었다. 어스름한 달빛이 마라난타의 방을 비추고 있었다. 지파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은데 심장이 먼저 알아차렸다. 쿵쾅쿵쾅 소리를 냈다. 지파사도 들릴 것 같았다. 애써 태연한 척 해야 했다. 그래야했다. 그녀를 오랫동안 보고 싶었다. 요 며칠 꿈에서 본 붉은 꽃이 떠올랐다. 같은 꿈을 연속해서 꾸고 있었다. 지상에서 처음 보는 꽃이었다. 지파사가 들어오는 데 꿈에 본 꽃과 겹쳤다. 꽃 이름을 지파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헛기침을 했다. 도라지를 달인 차를 들고 들어왔다. 지파사는 안 본 새 많이 야위어 있었다. 마주앉았다. 고개를 숙인 지파사였다. 찻상을 물리고 지파사가 방을 나갈 때까지 둘은 침묵했다. 서로의 심장소리가 신경 쓰였다. 자신의 심장소리를 신경 쓰느라 상대방의 심장소리를 듣지 못했다. 방문을 나설 때였다.

“지파사, 너를 오랫동안 보고 싶어. 너의 손을 잡고 싶고, 입을 맞추고 싶고, 널 샅샅이 보고 싶어. 하지만 널 위험하게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오랫동안 내 곁에 있어줘.”
지파사가 돌아섰다. 찻상을 내려놓고 마라난타에게 다가갔다. 달빛이 들어오는 창을 닫았다. 조금 전까지 심하게 두드려대던 심장소리가 멈췄다. 마라난타를 처음으로 마주보았다. 손을 내밀었다. 더 다가섰다. 돌아서려는 마라난타를 돌려세웠다. 옷을 벗었다. 샅샅이 보여주고 싶었다. 깊고 맑은 눈동자가 말했다. 괜찮다고 했다. 가슴과 가슴이 만나고 손과 손이 만나고 입술과 입술이 만났다. 마라난타가 깊은 잠이 든 것을 보고 지파사는 방을 나왔다. 달빛이 수줍게 지파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빗소리가 잠잠해지고 얕은 소리를 내고 있다. 산사가 고요하다. 집이었다면 아직도 소음소리가 함께 했을 터였다. 좋은 사람들을 새롭게 만나고 알게 되었다. 절에서 먹는 라면 맛은 일품이었다. 스님이 된장과 콩나물을 넣어 영양라면을 끓여주셨다. 보살님들과 맛있게 먹었다. 늦게까지 일을 하시고 새벽에 일어나 아침을 준비해야 하는 보살님들이었다. 하나같이 평안한 인상이었다. 나쁜 마음을 버리고 나면 그렇게 말간 얼굴이 될까? 생각했다. 지파사가 피를 토할 순간이 되었다. 마라난타가 피를 토할 순간이 되었다. 먹먹해진다. 새롭게 탄생한 주인공들이 아프면 작가인 나도 아프게 된다. 비가 멈췄다.

스나가 결혼식을 하고 집에 들어왔다. 하녀들의 관리는 스나가 하게 되었다. 반질한 얼굴의 지파사가 맘에 들지 않았다. 온갖 허드렛일을 시켰다. 재투성이가 되었다.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 마라난타와 지파사에 관한 이야기였다. 지파사가 마라난타를 좋아해 베다까지 공부한다는 소리였다. 스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녀는 온갖 추측의 이야기까지 다 하고 있었다. 스나의 마음이 요동치는 것을 하녀는 알지 못했다. 마라난타가 멀리 떠나고 없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뜸했던 붉은 꽃 꿈을 다시 꾸었다. 더 선명했다. 꿈에 지파사가 피를 토하며 죽어갔고, 그 주변에 붉은 꽃들이 만발했다. 어머니와 먼 길을 다녀와야 했다.

지파사가 보고 싶어 서성거렸지만, 지파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마라난타가 집을 떠난 뒤 스나는 지파사를 불렀다. 심부름을 다녀오라고 했다. 서둘러 심부름을 갔고, 남자들의 손에 끌려가 온갖 수모를 당했다. 지파사는 마라난타만 생각했다. 모든 수모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지파사의 집은 마라난타였다. 만신창이가 되었다. 몸이 찢기고, 불에 달궈지고 손톱이 빠졌다. 머리카락이 잘리고 옷이 잘려나갔다. 코에서 자궁에서 피가 흘렀다. 입술을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입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끝도 없는 고통이었다. 어느 순간, 고통이 멈췄다. 일어섰다. 지파사가 만신창이가 되어 누워있었다.

분명 자신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찢기고 피투성이가 된 자신이었다. 마라난타를 보고 싶었다. 그녀의 집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육신이 갈 수 없다면 영혼이라고 가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몸을 부르르 떠는 지파사였다. 남자들은 땅을 파서 지파사를 던져 넣었다. 지파사는 눈을 감았다. 푸르뎅뎅해진 자신의 몸뚱아리와 여기저기의 혈흔들을 차마 볼 수 없었다. 흙이 덮여졌을 때는 영혼마저 까슬해졌다. 마라난타가 비명을 질렀다. 명치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지난밤에 본 꽃들이 눈앞에 펼쳐지며 가슴이 아팠다. 지파사였다. 말할 수 없는 기운이 감돌았다. 지파사의 기운이었다. 그 기운을 따라갔다. 멀지 않은 곳이었다.

마라난타의 어머니도 아들의 걸음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아들의 눈은 현실에 있지 않았다. 두려운 마음으로 아들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마라난타가 도착했다. 급하게 얹은 흙더미였다. 지파사의 기운이 멈춰 섰다. 모든 형상이 보였다. 지파사가 심부를 떠나고, 남자들에게 끌려가고, 폭행을 당하고, 서서히 목숨을 잃어가는 것까지.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심장을 아무리 쥐어 보고, 쳐봐도 아픔이 가시질 않았다. 무릎을 꿇고 흙을 팠다.

하인들이 도우려했다. 마라난타와 눈을 마주치자 하인이 물러섰다. 두세 번 흙을 팠을 때, 물컹 잡히는 게 있었다. 지파사의 가슴이었다. 마라난타의 비명은 마라난타가 쓰러질 때까지 계속됐다. 돌처럼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자리에서 잤고, 그 자리에서 살았다. 지파사의 기운이 마라난타를 맴돌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꽃이 군락을 이루기 시작했다. 핏빛 가득한 꽃이었다. 마라난타가 꿈에서 본 형상이었다. 지난밤의 꿈을 기억했다. 지파사가 나타나 마라난타의 무릎을 베게 해주고,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마라난타가 해야 할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계급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100% 허구를 만들어냈다. 마라난타, 지파사, 스나, 스마나 이름을 빌려 썼다. 잠시나마 그 이름들이 살아 숨 쉬게 했다. 수드라의 신분인 지파사를 잠깐이나마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서 좋았다. 불갑사의 선선한 바람이 내 몸을 감싼다. 마음을 감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