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살의 장수목과 물속에 누워있는 소를 그려본다
500살의 장수목과 물속에 누워있는 소를 그려본다
  • 영광21
  • 승인 2004.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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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오제의 산실 법성포의 멋과 볼거리
제월정
이 정자는 법성의 멋을 대변해주는 제일의 작품이며 이 고장 선인들의 풍류를 전해주는 둘도 없는 명물이었다. 다랑가지 바로 위 월양태 위에 우뚝 서 있는 이 정자는 병자호란직후 훈련도정을 지낸 이 척이 경치 좋은 곳에 사우와 더불어 풍류를 즐기기 위하여 세운 것인데 당초의 당호는 영호정이었다. 후에 그의 아들 상원이 제월정이라 개명한 것이다.

여지승람에 의하면 이 척은 선조5년(1572) 영호정을 지었는데 영호정은 그의 아호이기도 했다. 효녕대군의 칠세손인 그는 병자호란시 남한산성을 수비한 무공으로 금대와 금권을 하사받기도 했다.

역사적 의의에서도 그렇고 풍류적 차원에서도 단연 법성의 백미인 제월정이 약 1970년대 환난으로 소실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지금은 그 자리에 초석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으니 황량하기 그지없다.

법성에서 살아본 이는 다 같이 아는 일이지만 독바우 삼거리에 돌아서면 첫 번째 시선을 끄는 것은 제월정이었다 한다. 날아갈 듯한 추녀끝 하며 고풍스러운 그 경관은 법성포 전체의 경색을 장악하는 압권이었다. 여기서 하나 더 아쉬운 것은 있을 법한 제월정의 사진을 찾지 못함이다.

숲쟁이
숲쟁이라는 방풍림은 어느때 어떠한 연유로 생성되었을까? 기록상으로는 정확히 어느 때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이 심어졌는지에 관한 것이 없다. 그러나 이 숲은 옹성 즉 법성수군과 진성과 연결돼 있으니 진성의 축조연대를 따지고 축성 목적 등을 밝힘으로써 자연히 알게 될 것이 아닌가? <법성진지>나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법성지성의 축성년대는 수군의 설화와 연초를 같이 하고 있다.

즉 중종 9년(1514)이니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500여년 전에 해당한다. 지금은 서문거리에 가면 성의 초석이 있고 그곳에는 정덕갑수 9월10일 해남70척 등등이라고 핵자돼 있다. 기록에는 석성의 주가 1688척, 고가 12척이라 하고 있으나 지금 가보면 성의 초입에는 석성으로 되어 있으나 중간 중간에는 토성이 되어있고 그 끝 부분에는 장수목인 느티나무와 팽나무를 혼식했다.

이것이 당시에 식재된 수목이었다면 약 500세나 된 노거수이다. 그래서인지 모진 강풍에 시달려서인지 근래에 한주 두주 고사돼 가니 안타깝다. 5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모질게 부는 북풍을 막아도 주고 여름에는 서늘한 녹음도 드리워 이 고장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훈을 하였겠는가? 단오절에는 흥겨운 민속놀이도 보았을 것이며 난중에는 가진 수난을 다 겪어 보았으리라.

부용교
숲쟁이 정중앙에 가르마를 타 듯 가느다란 소도길이 있었다. 비록 노폭도 협소하고 노면도 요철이 기하여 통행은 불편한 길이었지만 그 길은 홍농과 법성을 이어 주는 크나큰 길이었다. 그러던 것이 50여년전 검산진(법성 홍농간을 도강하던 나룻길)에 교량이 가설되면서 도로 확·포장이 된 것이다.

이로 인해 법성과 홍농간의 교통은 좋아졌지만 법성의 토주대감인 숲쟁이의 노목들이 수난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법성의 명물인 숲쟁이가 두동강이 난 것이다. 길 우측은 법성리 숲쟁이가 되고 좌측은 진내리 숲쟁이로 양분되어 버린 것이다.

이후부터 상스럽지 못한 말들이 무성히 떠올랐다. 숲쟁이를 갈라 놓으므로써 법성의 지맥이 잘리워 졌기에 어상에는 재수도 불길하고 포내에는 흉사가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옛풍속을 믿는 촌로들은 이를 액매기하는 방법은 동서를 이어주는 홍교의 가설이었다.

그 바램이 현실로 다가왔다. 이 고장 출신 장재필 군수의 특별한 예산배려로 구름다리를 놓게 된 것이다. 법성의 관문인 듯 이 멋진 홍교는 이름하여 부용교이다. 본시 이 고장은 불록(佛綠)의 땅이 분명하다. 1,600년전에 백제불교가 이 땅을 거쳐 들어왔고 부용교는 고려때 이 땅의 이름이 아니었던가!

와우정
1974년 법성번영회가 주관하여 건립한 정자이다. 예로부터 이 고장은 중국시인들까지도 작은 동정호(중국 항주에 있는 아름답기로 유명한 호수)라고 격찬할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때문에 시대는 변해도 많은 시인묵객들이 끊임없이 이 고장을 찾았으며 많은 시문도 남긴 바 있다. 화난으로 잃어버린 제월정을 얼마나 아쉬워들 했는가? 몇 해를 두고 그의 복원을 꾀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자 그 공허한 마음이라도 우선 메우자고 착안한 것이 이 와우정이었다.

당호를 와우로 한데는 의의가 깊다. 예로부터 법성은 수중와우라 했다. 지리적 형태가 마치 한 마리의 소가 물속에 누워있는 듯 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말이 옳다. 지금은 요소마다 간척한 탓에 형국이 변해 있지만 사대언이 생기기 이전에는 영락없는 수중와우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멋진 와탄언이 생기고 다음은 목맥, 을진, 독암의 순으로 막혔다. 그러나 멋진 와우정에 올라가 보니 정막하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