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온 숱한 일들에 대한 반성문 쓰는 마음으로 살아가고파”
“걸어온 숱한 일들에 대한 반성문 쓰는 마음으로 살아가고파”
  • 박은정
  • 승인 2011.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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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영산성지고 고진형 교장 퇴임식 … 구속 복직 교육위원 평교사 파란만장한 전교조 역사 산증인
정년퇴임하는 영산성지고 고진형 교장
“퇴임하면 교육운동하는 사람들을 도우며 전교조 전남지부 20년사 편찬위원으로 참여해 1989년 처절했던 전교조의 역사와 교육혁신을 위해 몸부림을 치던 지난 세월을 정리해 보고 싶습니다.”

1달여간의 여름방학을 마치고 교실로 돌아온 아이들의 재잘거림으로 다소 분위기가 들뜬 백수읍 길룡리 영산성지고등학교에서 정년퇴임을 맞는 고진형(63) 교장을 만났다.

커다란 키와 어진 웃음이 일품인 그는 “지난 2년동안 학생들의 이름을 익히고 선생님들의 장단점을 파악하며 매일 매일 학생들과 부대끼며 학생들이 성장하는 모습에 대한 감동에 푹 빠져 있었는데…”라며 정년의 서운함을 표현했다.

고 교장은 전남지역 교육민주화와 교육노동운동의 산증인으로 1989년 전교조 전남지부 초대부터 5번에 걸친 지부장직을 역임하고 제도권에 진출해 전남도교육위원으로서 민선 2·3·4대에 걸쳐 11년여 동안 교육행정의 혁신을 위해 헌신하다 2006년 교직에 복귀, 2009년 9월 대안학교인 영산성지고등학교로 부임했다.

고 교장은 파면과 구속, 복직, 교육위원 당선, 교육감 선거 출마, 사상 최초의 전교조 출신 교육위원 의장 역임, 평교사 복귀, 대안학교 교장까지 활동하며 전교조 역사의 한페이지를 파란만장하게 장식한 주인공.

광주출신인 고 교장은 1974년 3월 교직에 첫발을 내딛어 1989년 전교조 결성주도로 무안고에서 파면 해직되기까지 장성여고, 나주고 등에서 재직했다.

고 교장은 이 시기에 군사정권의 정치적 수단으로 전락한 교육현실을 목도했고 유신독재 체제를 거치며 사회와 정치적인 변혁의 연장선상에서 교육적 모순의 해결책을 찾기 위한 고민과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특히 1980년 5·18 민주화 항쟁을 경험하며 교사로서의 삶에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고 교장은 1980년 전교조 탄생의 태동이 되는 YMCA 중등교사회를 자발적으로 조직해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며 모순된 사회와 교육현실의 변혁을 위한 각종 연구활동과 교육선전사업을 수행했다.

이와 함께 1984~1988년까지 교육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무등야학’ 활동을 전개하는 등 교육민주화를 위한 조직체를 구성하고 교육자주권 옹호를 위한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기 시작했다.

“교육이 정권의 시녀로 전락하자 교사들은 이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모아 YMCA 교사회를 만들고 1986년 드디어 민주화 선언을 하게 됐죠. 이는 전두환을 잘 모르는 겁없은 교사들의 행동이었죠.”

1987년 교육민주화선언에 맥을 이은 전국교사협의회를 조직해 전남교사협의회 초대 회장으로 추대됐다.

그러던 중 고 교장은 1989년 교원노조가 합법화되지 않는 상황에서 전교조를 결성한 혐의로 전국 1,527명의 교사들과 함께 고난의 역정을 걸었다. 이후 수차례 수배와 경찰서 유치장 구금생활을 하던 고 교장은 전교조를 주도적으로 결성했다는 이유로 결국 구속되고 파면됐다.

감옥에서 출소한 고 교장은 거리의 교사생활을 전전하며 전교조 전남지부 1, 2, 4, 6, 7대 지부장으로 활동했다. 전교조 합법화 이후인 지난 1994년 전남지역 복직대상자 187명중 유일하게 복직제외자로 분류돼 미복직 처리되는 아픔도 겪기도. 이후 지방교육자치시대를 맞아 1995~2006년까지 전라남도 교육위원으로 활동하며 낙후된 전남교육의 개혁을 위해 전국에서 최초로 농어촌교육특별법제정을 위한 운동을 펼쳐 전라남도교육청으로부터 정부에 특별법 제정을 제안하는 행정을 이끌어 내는 괄목할 만한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전교조 출신으로는 전국 최초로 2003~2004년까지 도교육위원회 의장을 역임했고 전국의장단협의회 친목회장를 맡아 특유의 친화력으로 통합과 추진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또 교육위원으로서 사단법인 전남교육연구소를 설립해 대학교의 교육학자들과 현장교사들이 주축이 돼 공동으로 교육혁신을 위한 제반조사와 연구활동을 전개하는 등 전남교육의 비전을 수립하는데 일조했다.

고 교장은 2006년 불출마를 선언하며 남다른 각오로 18년만에 일선학교 평교사로 복귀했다.

“일선 교육현장의 교실붕괴현상, 지나친 사교육문제, 학교들의 교사들에 대한 불신 등이 매우 심각함을 보고 교육운동가로서 살았던 삶과 일선 학교 현장에서 교사로서 느꼈던 삶에서 오는 괴리감에서 큰 실망을 가졌다”는 고 교장은 명예퇴직을 고민하던 2009년 9월 평소 동경의 대상이었던 대안학교 초빙교장으로 부임해 2년동안 재직하면서 실천중심, 학생중심, 공동체 교육중심의 대안학교의 모델을 제시했다.

“대안학교의 바람직한 모델을 일선학교에 전파하는 것이 마지막 책무라고 생각했는데 여의치 않게 돼 아쉽다”는 고 교장은 거창한 이력보다는 전체모임 시간에 커다란 키를 낮추고 학생의 눈높이에 맞춰 인문학과 인권을 자상하게 들려주던 자상한 ‘키다리 할아버지 선생님’으로 학생들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

5형제중 장남으로 태어나 전교조 활동을 펼치는 아들에 대해 못마땅해 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화해를 하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는 고 교장은 아내와 1남1녀의 자녀 그리고 함께 고생한 전교조 교사들에 대한고마움을 비추며 오는 30일 그토록 사랑하던 교단을 떠나간다.

박은정 기자 ej0950@yg21.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