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현 열사 19주기를 맞아
1982년 10월13일 전국 각 일간신문들은 일제히 영광의 아들, 광주의 아들, 이 땅의 아들 박관현 열사의 죽음에 관해 내용을 보도했다.‘광주지법에서 지난 소요죄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항소중이던 박관현 피고인(30)이 12일 새벽 2시10분경 전남대 부속병원 중환자실에서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숨졌다. 박 피고인은 지난 4월9일 구속 기소돼 광주교도소에 수감중 지난 10일 오전 10시경 가슴이 답답하고 통증이 온다고 호소, 교도소 의무실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이 날 오후 5시 반경 전남의대 부속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던중 숨졌다.
광주지법 강현준 부장판사는 이에 앞서 11일 오후 2시 박 피고인에 대한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내렸다.’(동아일보 1982년 10월13일자 사회면 2단 보도내용)
그러나 이미 운명 직후인 10월12일 새벽부터 박관현 열사를 찾는 사람들이 전남대 부속병원에 속속 모여들었다. 주검이란 어둠을 뚫고 열사는 확실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광주는 이미 박관현 열사의 사망을 알리는 벽보와 현수막이 나붙기 시작했고 모든 입과 입, 귀와 귀는 진실한 사인에 대한 의문으로 용광로처럼 뜨겁게 들끓었다.
더욱이 “전체 재소자의 처우가 개선될 수 있다면 어머니 나는 죽어도 좋아요”라는 박관현 열사의 마지막 유언이 전해지면서 사태는 한층 걷잡을 수 없이 돼 갔다.
순식간에 광주는 합의라도 한듯 일제히 광주의 아들 박관현 열사가 왜 죽었는가, 어떻게 죽었는가를 따지면서 분연히 일어섰으며 1980년 5월을 방불케 하는 시민들의 분노가 광주 전체를 확연하게 휘감았다.
이들은 열사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기관원의 출입을 통제하는 등 나름대로 자위책을 강구해 나갔다.
그러나 밤11시가 넘어 영안실을 지키는 사람들이 일시 줄어든 틈을 타 아침부터 병원 봉쇄에 나선 경찰병력이 영안실 문을 부수고 들어와 울부짖으며 저항하는 부모·형제·동료들을 무차별 구타하고 연행하면서 열사의 시신을 빼앗아갔다.
당시 시신을 지키는 사람은 40여명이었고 경찰은 사복경찰을 포함해 600여명이었다.
자정을 막 넘기가 무섭게 열사는 사체부검이라는 미명하에 부모형제 하나 참관하지 못한 채 관속에서 다시 꺼내져 갈기갈기 찢기어졌다. 그리고 곧바로 경찰 앰블런스에 실려 새벽 3시의 칠흙을 가르며 불갑면 쌍운리 그의 고향집에 돌아오게 됐다.
10월13일 아침 광주 남동성당 내에 박관현 열사의 빈소가 마련됐다. 그의 생명은 죽음으로도, 찢겨진 육체를 훔침으로도 결코 앗아갈 수 없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 살아있었다.
신문과 방송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침묵했지만 시민들은 마치 연판장을 돌린 것처럼 남동성당 앞에 조문 행렬을 이뤘다. 경찰 기동대의 삼엄한 경계속에 이어진 조문 대열에서는 오열과 한숨이 교차했고 독재정권에 대한 분노와 원한이 한 덩어리가 됐다.
“박관현 열사의 죽음은 광주의 죽음이다. 광주시민은 총궐기하자.” 학생들은 13일 오전 10시 열사의 모교인 전남대 5월의 광장에 집결해 1980년 5월 이후 최초·최대 규모의 격렬한 시위를 이후 약 1주일간 전개했다.
이러한 가운데 박관현 열사의 처참한 죽음의 소식은 삽시간에 마음에 마음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주요 외신들은 이를 받아 ‘40여일간의 단식투쟁 끝에 숨진 광주의 넋 아니 대한민국의 넋 박관현 열사’를 전세계에 알렸다.
열사의 시신만은 지키려 했던 우리의 노력은 현실적인 힘에 굴복하고 말았다. 버젓이 눈을 뜬 상태에서 시신을 빼앗긴 뒤 1주년을 추모하는 추모제의 추모사를 쓴 나로서는 그날의 설움과 아픔이 지금까지 가슴속 깊은 곳에 옹이가 돼 남아 있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한 몸을 기꺼이 산화하신 열사에 대한 처우는 반드시 바뀌어야만 한다.
특히 열사의 고향인 영광군은 추모사업을 지속적으로 이어가지 않는다면 역사의 뭇매를 맞을 것이다.
박 찬 석 / 본지 편집인oneheart@yg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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