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쌈 덕에 집과 논밭도 장만허고 자식도 갈치고 다했제”
“길쌈 덕에 집과 논밭도 장만허고 자식도 갈치고 다했제”
  • 박은정
  • 승인 2004.08.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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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문화예술인55- 길쌈 이정숙
마을 동쪽에 월랑산이 있고 월랑산에 달이 비치면 그 빛이 제일 먼저 비치는 마을 이라고 해 ‘월산’이라고 칭하게 됐다는 대마면 월산 마을에서 50여년 전부터 길쌈으로 유명한 할머니기 있다기에 만나보았다. 마을 주민들과 함께 말린 담배잎을 다시 정리하느라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있는 이정숙(73) 할머니.

시골의 순수한 정이 듬뿍 담긴 얼굴로 반갑게 맞이한다.“내가 뭐 잘한 것이 있다고 찾아왔댜”라며 “어여 들어와 이쪽 그늘에 앉어”라고 담배를 정리하는 자리 한켠을 내 준다.
묘량면 효성 마을이 고향인 이정숙 할머니는 18살에 월산마을로 시집 와 생활하며 25살 되던 해부터 길쌈을 하기 시작했다.

예전 부녀자들이 집안에서 베 모시 명주 무명의 직물을 짜는 모든 과정을 베길쌈 모시길쌈
명주길쌈 무명길쌈으로 나눠 불렀다. 베길쌈 모시길쌈 명주길쌈은 삼한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무명길쌈은 고려말부터 시작된 것으로 전한다. 길쌈을 통해 만들어진 직물은 농가의 주요한 소득원이었고 화폐의 대용으로 쓰이는 등 자급자족적 의류 충당뿐만 아니라 경제적 유통을 위한 구실도 담당했다.

그 시절 부녀자들이 대부분 길쌈을 하고 지내기는 했어도 모두가 길쌈을 잘 했던 것은 아니다. 함께 담배잎을 정리하던 마을의 한 노인은 “이 할매의 베짜는 실력은 아무튼 알아줬당게”라며 “우리 마을뿐만이 아니고 다른 마을까지 댕기며 베를 짜주고 다녔은게”라고 전하며 이정숙 할머니의 그 당시 유명세를 알렸다.

이정숙 할머니는 “공부를 할라치면 머리에 하나도 안 들어온디 손으로 무엇을 하라면 무엇이든 척척 했었제”라며 “길쌈은 외할머니가 잘했다는 말은 들었는디 누구한테 배운것도 안닌디 내가 그렇게 잘 할줄은 몰랐당게 재주는 물려받는 것이 맞는 가벼”라고 지난 세월을 회상했다.

그는 또 “그때는 길쌈이라면 지긋지긋 했는디 지금 하라치면 지금도 잘 할 수가 있을 것 갔당게”라며 “그래도 길쌈 덕에 집도 장만허고 논밭도 장만허고 자식도 갈치고 다했제”라고 어려운 시절 도움을 많이 받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이정숙 할머니는 61세 되던 해 남편과 사별하고 슬하에는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딸5섯중 셋째딸로 태어난 이정숙 할머니는 96세로 돌아가신 친정어머니를 지난해까지 모셨다. 5남1녀의 셋째 며느리인 이정숙 할머니는 베를 잘 멘다고 해 시어른들에게도 사랑을 많이 받았
다고 한다.

조선 말기까지 흔히 행해지던 길쌈은 개화기와 서양직물의 수입으로 의류소비형태가 바뀌면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지만 그 후 1950년대 이후로도 길쌈놀이의 전통은 농촌의 부녀자들에게 전승돼 시골마을에서 오랫동안 행해져 왔다. 이런 우리 전통문화의 산 증인인 이 할머니는 흐르는 세월속에 그렇게 묻혀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도 안동 한산 금성 나주 등의 지역에서는 오늘날까지 전통적인 길쌈이 이어지고 그들의 제작방법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전수되고 있다. 어쩌면 할머니의 생이 마감되는 날과 함께 그의 길쌈 기술도 그가 짠 베들도 자취를 감춰 버릴 것 같은 아쉬움과 불안함이 교차하는 그런 만남이었다.

이처럼 우리 지역에는 전통을 그대로 간직해온 향토 예술가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농촌의 바쁜 일상에 가리워지거나 혹은 세상을 떠나가 잊혀져 가는 그들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소중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