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수성록에 나타난 의병활동은 ‘동맹결의’
임진수성록에 나타난 의병활동은 ‘동맹결의’
  • 영광21
  • 승인 2012.06.1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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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수성사에 봉안한 55인의 위패는 ‘개인’ … 임진수성 결의 주체는 향교

■ 호남학 이야기 - 영광 의병사 ②

여기서 드러나는 문제점은 바로 왕을 비롯한 귀족들과 백성들과의 관계이다. 선조는 기록에 보이듯 무능한 왕이었다. 왜군에 대항하려는 생각보다는 자신의 안위가 먼저였으며 도망가기에 바쁜 군주였다.

하지만 전국에서 목숨을 걸고 일어난 서민 중심의 의병들은 자신들의 주린 배를 돌보지 않고 곡식을 모아 왕이 도망가던 중에 머물렀던 행재소로 보낸다. 그리고 자신들은 열악한 조건으로 왜군의 신식 무기와 싸우다가 죽어갔다.

결국 나라의 존재로 인한 부귀와 영화는 왕을 비롯한 귀족들이 누리고 그러한 그들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가장 하층부의 백성들이 나서야 하는 모순을 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당시로 끝나지 않고 현재까지 끈질기게 이어져 내려온다. 
 
임진수성사

영광군의 임진왜란은 당시 생생한 기록인 <임진수성록>으로 남아 고증을 거쳐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01호로 지정이 되면서 더욱 빛을 발했다. 사서로서의 중요함이 인증된 것이다.

그리고 <임진수성록의 기록>을 바탕으로 영광임진수성사적보존회를 개설하고 임진수성사라는 사우祠宇가 건립이 된다. 임진수성기념사업의 경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1784년 : 어사 한광회가 수성 유적을 살펴본 후에 수성록 간행을 촉구. 유최기 군수가 서문과 함께 태청산의 봉정사에서 수성록 초판을 발행함.
▶ 1964년 : 영광향교에서 오성관창의수성제현筽城館倡義守城諸賢 추모회 발족, 수성제현의적비 건립(영광군청 내), 제현실기 간행
▶ 1992년 9월 : 오성창의 기념사업회 결성
▶ 1994년 12월 : 영광 임진수성편제와 향토방위에 관한 논문 발표(전남사학회)
▶ 1998년 2월 : 영광임진수성록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01호 지정, 임진수성록 한글 번역본 간행
▶ 2000년 12월 : 영광군으로부터 사우 부지 불하 받음(영광읍 무령리 315-55, 군립도서관 옆)
▶ 2001년 2월 : 기념사업회를 사단법인 영광임진수성사적보존회로 개칭
▶ 2001년 4월 : 임진수성사 기공식

이렇게 건립된 임진수성사는 현재 별채로 지어진 자료실과 함께 위용을 자랑하며 군립도서관 옆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아직 생존하고 있는 건립 허가 당시의 군수 공적비도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서있다. 좋은 기록을 남겨 훌륭한 자료를 후세에 남겨준 선조들의 공을 인정하며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위에 제시한 <임진수성록>에 나타난 영광군 관련 기록을 보면 가장 두드러진 의병활동이 ‘회합’임을 알 수 있다. 수차에 걸쳐 향교에서 그리고 오성관에서 결의를 했다는 내용이다.

물론 이렇게 결의를 한 결과는 의곡과 무기가 될 재료를 모아서 의병소와 행재소로 보내기도 하는 행동으로 나타나지만 결국 <임진수성록>에서 보이는 의병활동은 동맹결의였던 것이다. 창칼을 들고 영광읍성을 지키기 위해 전투를 치르고 전사자가 속출하는 그런 수성은 영광에선 없었으며 이웃 의병소로 군사를 보내고 의곡 등을 보낸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임진수성록>은 그 기록의 가치로서 중요한 것이지 결코 임진수성사라는 건물이 건립됨으로 해서 중요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성의 의지를 다진 선비들의 기상과 의기를 폄훼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으며 정말 존중한다.

하지만 문제는 사적인 발상에서 기인한 의식의 개연성이 없는 건물의 일방적인 건축과 사적인 목적성이다. 전문에 수성록의 영광 관련 기록을 발췌 기록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자랑스러운 문화재 수성록을 내세워 행정기관에서 사업비를 지원받아 많은 돈을 들여 지은 수성사가 개인의 위패를 모시는 곳으로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수성록에서 분명 적시하고 있듯이 임진수성 결의는 향교가 주체였으며 개인의 자격으로 혹은 관의 주도로 이루어진 사실은 아무것도 없었다. 현재 수성사에서 당시 수성동맹의 중심에서 활약했던 55인의 위패를 모시고 그 후손들이 추원봉사를 하고 있음은 분명한 잘못이다.

후손들은 자랑스럽게 생각하겠지만 이는 오히려 훌륭한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결과를 만들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훌륭한 어른들을 향교라는 공적 입장에서 추원을 올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개인들의 입장에서 55인의 위패만을 모시고 배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조상들의 공적을 축소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더욱 큰  문제는 우리의 고질적인 문제인 ‘대표근성代表根性’이다.
실제 55인들이 전투에서 장렬하게 산화하신 분이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자. 정말 사우를 짓고 기려야 할 분들은 이들의 지시로 각 의병소로 들어가 목숨을 내던진 말단 의병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완전히 잊히고 주로 ‘회합’을 통해 수성의 의결만을 했던 55인만을 배향한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또한 임진수성사 건립 당시 영광향교 전교는 신문 기고를 통해 제반 문제점을 제시하며 “건립사에 주체인 향교와 유림은 단어조차 들어가 있지 않으며  수성사의 얼굴인 묘정비의 비문 내용과 격식이 본질적으로 왜곡되어 있다”고 강한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었다.

55인의 후손들이 건립비를 거출해 짓지 않았다면 임진수성사는 55인의 위패를 허물고 향교유림의 이름으로 왜란으로 산화해 간 모든 호국영령들을 위한 배향을 해야 한다.

당시의 55인 선조들도 자신들만을 위한 추원은 바라지 않을 것이다. 향교유림들의 이름으로 행해졌던 수성결의가 어떻게 개인 문중사우로 들어가 앉았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고칠 것은 고쳐 나가야 한다. 역사는 우리 삶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강항과 임진왜란
강항의 가계와 내산서원은 다른 자료들을 통해서 살펴볼 기회가 많았음을 감안해 생략하고 임진왜란 당시 의병활동을 약식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영광수성에 참여한 유림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굵은 글씨가 강항의 가계에서 참가한 의병이다.(옥당골 전통문화 / 1983 참고)

도별장 : 생원 이응종 쫚 부장 : 전만호 강 태  종사관 : 이홍종, 이 곤, 신장길 쫚 종사관 겸 폐막관 : 임수춘  종사관 겸 참모관 : 정희열  군정 : 이굉중, 정희맹  참모관 : 이 헌, 이안현, 이 옥, 노석령, 류익겸, 김재택, 봉단의 장문서 : 김태복, 이 분, 강 항  장문서겸 폐막관 : 이극부  수성장 : 오귀영 종사관 : 김남수, 정여기  도청서기 : 김구용, 정응벽, 오 윤, 정 구 쫚 대장군관 : 정 경, 류영해, 이효안, 이극양, 이극수 쫚 부장군관 : 김 운, 류 집, 강 윤 쫚 남수문장 : 이희익, 강극효 쫚 북수문장 : 김대성, 이 거  중위장 : 최희윤  중부장 : 이희용  유군장 : 김찬원  서외진장 : 이효민 남외진장 : 김춘수  동외진장 : 한여경  서종사관 : 김 경, 김수해  남종사관 : 이유인  동종사관 : 김광선  군관 : 김정식, 송약선, 정여덕, 정 념  수성군관 : 강 락 군관 : 김봉천  모군별장 : 류광형, 이 거

강항의 가계에서 참가한 인물은 강 태, 강 항, 강 윤, 강극효, 강 락 등 5인으로 강 태와 강극효를 제외한 4인은 모두 삼수변을 돌림자로 하는 같은 세대임을 알 수 있다.
/ 다음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