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에서 태어나 영광에서 여생 마감을…”
“영광에서 태어나 영광에서 여생 마감을…”
  • 영광21
  • 승인 2012.12.28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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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정신적 지주 영원한 영광인 정 종 박사

흰머리와 흰수염이 무성한 노인이 우스꽝스럽게 모자를 뒤집어쓰고 수레에 몸을 의지해 집을 나서고 있다.

저 아래 터미널 앞에 있는 빵집에선 500원이 더 싼 빵을 살 수 있어서 멀리 가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

그저 평범한 시골 노인에 지나지 않은 이 사람이 바로 우리나라 공자학을 일군 영광출신의 철학자 ‘온버림’ 정 종(99) 박사다.

정 종 박사는 지난 1915년 영광읍 도동리에서 소상인이었던 아버지 정동희(1892 ~ 1936)와 어머니 조 희(1894 ~ 1978)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지금의 영광초등학교인 영광공립보통합교를 졸업하고 배제교보와 지금의 동국대인 중앙불교전문학교를 거쳐 일본의 동양대에서 유학했다. 해방 직후에는 귀국해 영광으로 돌아와 영광여자중학교의 전신인 민립중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치고 퇴임할 때까지 동국대, 전남대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특히 박사는 지난 1980년 11월 전국규모의 공자학회를 창립한 주역으로 부회장을 5년간 맡다가 지난 1986년부터 1990년 가을까지는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선생님은 죽는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으셨어요. 비록 몸은 나이가 들어 노쇠했지만 그분의 사상은 항상 깨어있어 여느 젊은이 못지 않았습니다.”

정 박사의 제자인 이정연 불갑우체국장의 스승에 대한 평이다.

부귀,명예,권위를 내려놓은 온버림
정 박사의 호 ‘온버림’은 부귀, 명예, 권위 모든 것을 버린다는 의미로 박사의 성품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한 말이 있을까 싶다. 한 때 교수였고 박사라는 사회적 지위를 가졌음에도 이를 내세우거나 대접받기를 바라지 않았던 그다.

정 박사는 보이는 껍데기보다 정신적인 알맹이를 채우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독서량도 상당했는데 나중에는 책을 볼 수 없게 되자 녹음을 해 하루 종일 듣기도 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에게 책은 영원한 진리와 깊은 지혜를 구하는 역할을 했을뿐 아니라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기도 했다.

박사는 영광으로 거주지를 옮긴 후에도 꾸준히 강단에 섰다. 정형택 영광문화원장은 교육자로서 그의 고집스런 한 단면도 소개했다.

“지난 2008년에 모셔서 강연을 하는데 도중에 강단에서 쓰러졌어요.

그래서 119소방센터로 전화를 하고 사람들이 다 올라가서 선생님 몸을 주무르고 난리가 났지요.

그런데 정신을 차리시더니 병원도 안가고 다시 강연을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겁니다. 결국에는 그 강연을 다 끝마치고서야 강단에서 내려왔지요.”

박사는 제자들에게 9학기 동안이나 학점을 주지 않는 등 엄격했지만 우연히 만난 아이들에게 짜장면도 사주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함께 지낼 정도로 아이들을 사랑하기도 했다.

제자 이정연 불갑우체국장은 “아이들이 선생님께서 잘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돈이 들어있던 함을 가져가는 일도 있었다”며 “그런데 선생님은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아이들이 잘못될까봐 걱정하셨다”며 박사와의 얽힌 일화를 소개했다.

유난히 영광을 사랑한 노학자
박사는 23년간의 동국대학교 교수직을 퇴직하고 고향인 영광에서 남은 노년을 보내고자 했다.

하지만 영광에 마땅히 기거할 곳이 없어 1998년에서야 비로소 고향에 돌아오게 됐다.

그동안 맺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한풀이라도 하듯 고향의 후학들을 위해 평생 아끼던 <태백산맥> 등 4,433권의 도서를 영광군립도서관에 기증하고 적잖은 나이에도 활발한 강연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박사의 고향사랑의 일면은 그가 81세 때 만년의 노고를 묶어낸 책인 <고향의 시인들과 시인들의 고향>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일제의 암울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고향의 저항정신과 정서를 지켰던 영광시인들의 이야기를 북으로 떠나보낸 당시 영광의 많은 지식인들과 동생을 생각하며 썼다. 


박사의 동생은 한국전쟁 무렵 월북했는데 현재 동생은 사망하고 조카 둘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박사는 조카들이 고향에 있는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해 옷과 가방 등을 사서 간직해 두었다고 한다.

제자 이정연 우체국장은 “박사님이 현재 몸이 좀 불편해 대전에 있는 아들 집에 머물러 있는데도 자꾸만 고향인 영광으로 내려 오시려고 하셔서 너무 마음이 아프다”며 안타까워 했다.

정 박사는 운명도, 장례도 영광에서 치르기를 희망한다. 날 때도 돌아갈 때도 영광과 함께이고 싶은 천상 영광인이다. 어느 누가 이보다 더 영광을 깊이 사랑하겠는가.

그가 걸어온 철학자로서의 삶도 대단하지만 영광에 대한 노학자의 끝없는 사랑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 어떤 물질적인 것보다 정 박사와 같은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고장 영광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자 정신적 지주로서 지역주민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길 기대해 본다.
박은희 기자 blesstoi@yg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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