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야흐로 ‘지식이 해방된’ 시대를 살고 있다. 웬만한 것은 PC나 스마트폰 검색으로 얼마든지 습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식에서 해방됐다고 해서 다 지식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지식인이 됐다고 해서 타인보다 나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지식에 깊고 낮음이 있듯이 지식인도 같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덕德이 뒷받침되지 않은 지식인이나 사회지도자는 그 알량한 지식으로 남을 깔보고 무시하기 일쑤다.
‘지식에서 학식으로’
보고 들어 알아서 가리는 지식과 배워서 가리는 학식은 바로 이 지점에서 갈라진다. 당나라 때 학자 유지기가 학자, 특히 역사가의 자질로 ‘재才’, ‘학學’, ‘식識’을 꼽은 것도 재주에만 의존하는 얄팍한 지식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청나라 때 학자 장학성은 여기에다 ‘덕’을 더 추가했다.
보고 듣고 알고 배운 것으로 세상과 사람을 논하고 가리되 제대로 논하고 가릴 수 있는 자질, 즉 덕을 갖추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마천은 배움은 그저 보고 읽고 쓰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봤다. 그는 배움은 우선 자신이 좋아서 해야 하고 그렇게 배운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할 줄 알아야만 마음으로 그 의미를 알게 된다고 했다.
이것이 저 유명한 ‘호학심사好學深思, 심지기의心知其意’라는 사마천의 공부법이다.(<오제본기>) 그러면서 천박하고 고루해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이런 공부법은 다 소용없다고 했다.
학식이란 많이 배운다고 터득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보고 듣고 배운 것을 바로 적용하고, 그를 통해 옳고 그른 것을 분명히 가리고, 나아가서는 다가올 조짐까지 예측할 수 있어야 학식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
“미미한 것을 보고서도 맑고 흐린 것을 안다(견미이지청탁見微而知淸濁).”(<오태백세가>)
“미미한 것을 보고 장차 드러날 것을 안다(견미이지저見微而知著).”(<송미자세가>)
‘학식에서 지혜로’
이 정도의 경지에 오르면 말 그대로 지혜롭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한나라 때 원강은 <월절서越絶書>(월절덕서외전)에서 “그러므로 성인은 미세한 것을 보고도 장차 드러날 것을 알며 처음을 보고 끝을 아는 것이다”라고 했다.(여기서 견미지저見微知著, 시미지저視微知著, 이미지저以微知著, 도시지종睹始知終, 견시지종見始知終 등과 같은 성어들이 파생돼 나왔다.)
이제 지식은 개인적 차원이 아닌 사회적 차원의 산물이 됐다. 하지만 학식과 지혜는 여전히 개인적 차원과 경지에 놓여 있다. 요컨대 지식을 통해 학식을 축적하고 이를 지혜로 승화시켜야만 지식을 제대로 가공하여 사회에 유용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어떤 면에서는 과거보다 훨씬 지식인의 역할이 중요해 졌다고 할 수 있다. 소수에 한정돼 있던 지식인이 이제 집단 지성으로 변모하고 있고 이들이 사회적으로 큰 힘과 역할을 하는 세상이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식과 지혜가 더욱 요구된다고 하겠다.
일을 처리하거나 사람을 쓸 때는 더욱 더 학식과 지혜가 요구된다. 작게는 가정과 조직 그리고 나라의 흥망과 연계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마천은 “어리석은 사람은 이미 이루어진 일에 대해서도 어둡고 지혜로운 사람은 일에 앞서 그 싹을 볼 수 있다(우자암성사愚者暗成事, 지자도미형智者睹未形)”고 지적한다.(<조세가>)
지난 5년 우리 사회는 사마천의 지적 그대로 이루어진 일에 대해서도 어두웠다. 불과 몇년을 내다보지 못하고 대책없이 엄청난 사업을 밀어붙였고 여전히 그 어리석은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이제 멈추고 차분히 뒤를 돌아보면서 지난 행적을 반추할 때다.
김영수 센터장
영광군청소년상담복지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