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도 자식이라 돌아가시는 날까지 도리 다해”
“며느리도 자식이라 돌아가시는 날까지 도리 다해”
  • 영광21
  • 승인 2013.05.02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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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임 <홍농읍>

“이제 와서 지난 세월을 생각하면 내가 어떻게 살아왔나 싶어.”

밭에서 일하느라 오후 늦게나 만날 수 있다는 김연임(68) 어르신을 만나기 위해 그녀가 일하는 홍농읍 가마미해수욕장 인근의 고추밭을 찾았다. 서둘러 일손을 멈추고 밭 가장자리에 털썩 앉은 그녀는 “몸이 멀쩡한 데가 없다”며 가쁜 숨을 몰아쉰다.

김연임 어르신은 지난 2010년 효도회영광군지회가 해마다 선정해 시상하는 효행상 수상자다.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혼자 몸으로 홀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그녀의 효심이 주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줬다.

산에서 일을 하다 허리를 크게 다친 그녀의 남편은 꼼짝없이 방안에만 누워있다 세상을 떴다. 그때 그녀 나이 45세. 남편의 죽음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그녀에게 아들 하나에 딸 넷의 5남매와 시어머니를 부양해야 하는 책임이 주어졌다. 당시 막내는 초등학생, 아들은 중학생, 나머지 딸들도 고등학생이었다. 앞이 깜깜했다.

김 어르신은 “남편이 죽고 재산도 하나 없어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막막했다”며 “나중에는 큰딸과 작은딸이 많이 도와줬지만 자식들을 고등학교라도 졸업시킨 것이 신기할 뿐이다”고 말했다.

김 어르신은 원자력본부에서 청소부로 일하면서 퇴근후에도 쉬지 않고 밭일을 하는 등 열심히 살았다. 워낙 가난한 살림이었기 때문에 양념값이라도 벌기 위해 양파며 고추 등을 심었다. 1년 365일 눈이 내려 밭을 덮는 날을 빼고는 퇴근후에는 밭에서 일을 했다.

김 어르신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일했다”고 한다.

힘든 환경속에서도 김 어르신은 자식된 도리로 시어머니를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남편이 3대 독자라 시누이들 외에는 다른 형제가 없었고 시어머니도 가마미를 떠나고 싶지 않아했다. 시어머니는 3년전 그녀가 일을 하러 나간 사이 9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 어르신은 “아침이면 첫차 타고 일을 하러 갔는데 꼭 밥을 해서 밥통에 담아놓고 나갔다”며 “나중에는 치매증상으로 대소변도 못 가리고 ‘밥도 안준다’고 없는 말을 해도 며느리도 자식이라 돌아가시는 날까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김 어르신은 여기저기 아픈 곳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힘든 줄 모르고, 아픈 줄 모르고 악착같이 살다 이제야 긴장을 놓으니 아픔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힘들기는 했지만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허전하고 그립기도 하다는 김연임 어르신.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하고 싶었다는 그녀의 모습은 시댁을 ‘시월드’라 부르며 기피하는 우리 세대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서화 기자 lsh1220@yg21.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