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재정권 시절을 겪은 사람이라면 애국애족愛國愛族이란 구호에 심하면 치를 떨지 모른다.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담보로 한 무작정 애국애족은 그 자체로 폭력이었기 때문이다. 국가지상주의에 함몰된 애국애족이란 구호는 이제 정말 꼴통 수구 보수주의자들이나 입에 담는 낡은 개념이 되어 버린 것 같다.
그런데 사마천의 <사기>를 읽다 문득 문득 마주치는 애국에 관한 일화와 명구들이 새삼 나라사랑에 대한 상념을 자극한다. <사기> 뿐만 아니라 중국 고전들에 애국과 관련한 대목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망외望外의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그런데 중국 고전속 애국은 거의 전부가 애민愛民과 연계돼 있다. 이를 민본사상이라 하는데 먼저 <순자>의 한 대목을 보자.
“인재를 아끼는 나라는 강하고 인재를 아끼지 않는 나라는 약합니다(호사자강好士者强, 불호사자약不好士者弱). 백성을 사랑하는 나라는 강하고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 나라는 약합니다(애민자강愛民者强, 불애민자약不愛民者弱). 정책에 믿음이 있는 나라는 강하고 정책에 믿음이 없는 나라는 약합니다(정령신자강政令信者强, 정령불신자약政令不信者弱).”(<의병>편)
더 이상의 설명은 사족이 될 정도로 명쾌한 논리이다. 나라의 부강이 인재와 백성을 얼마나 아끼느냐로 결정된다는 요지이다. 이런 ‘애민’은 오늘날 봐도 산뜻하게 느껴질 정도다. 정치적 구호를 내세울 때도 깊은 생각과 철학이 동반돼야 한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애국애족’이 아닌 ‘애민애국’이었으면 어땠을까? 어쨌거나 순수하지 못한 정치적 의도를 담은 구호를 떠나 <순자>의 위 구절을 음미해 보면 정말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다.
<사기> 속 애국자 굴원
<사기>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 중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이 적지 않다. 굴원이란 남방 초나라의 시인이자 정치가는 몰락해 가는 조국의 모습을 살아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며 멱라수라는 강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그런데 굴원은 그저 단순히 멱라수에 몸을 던진 것이 아니었다. 그 장면을 한번 보자.
“굴원은 그 사실(자신의 왕 회왕이 진나라에 가서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은 일)을 한스럽게 여겼다. 추방당한 처지였으나 (조국)초나라를 그리워하고 회왕에게 미련을 두고 다시 그 곁으로 돌아가길 기대했으며 또 왕이 깨달은 바가 있어 나라의 운이 나아지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왕의 덕과 나라의 운이 다시 일어나 허물어져 가는 나라의 기운을 회복해 보고자 시 한편에 세번씩이나 그 뜻을 펼쳐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끝내 어찌할 수가 없었고 회왕은 돌아오지 못했으니 회왕은 끝까지 잘못을 깨닫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중략) 이에 <회사懷沙>라는 부를 지었다. (내용 생략) 그리고는 바위를 품고 마침내 스스로 멱라수에 가라앉아 죽었다.”
굴원은 망해가는 조국, 어리석은 지도자, 사악한 간신 모리배들, 자신의 충정에 대한 오해와 모함 등 온갖 회한을 바위에 응축시켜 이를 끌어안고 스스로 멱라수로 걸어 들어가 가라앉아 죽은 것이다.
이는 자포자기가 아닌 강렬한 저항이었다. 조국을 누구보다 사랑했기에 초나라의 백성을 그 어떤 것보다 아꼈기에 그는 그냥 자포자기식으로 절벽 위에서 몸을 던져 죽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바위를 꽉 끌어안은 채 서서히 가라앉았다.
굴원이 죽기 전 머리를 풀어헤친 채 강가를 거닐며 시를 읊고 있을 때 한 어부가 그를 보고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온 세상이 흐리지만 나만 홀로 깨끗하고 모두가 취해 있지만 나 홀로 깨어 있기에 이렇게 쫓겨났소이다.”
진정한 애국이란 이런 것이다. 모두가 저만 살겠다고 서로를 물고 뜯을 때도, 나라야 어찌 되건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자들이 넘쳐 날 때도 제 정신으로 바른 길을 고집하는 사람이 진짜 애국자다.
좋은 말·글 있는 그대로 되돌리자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사마천은 나라의 안위와 존망을 정책과 인재에 결부시켰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백성에 대한 강렬한 사랑이 세차게 흐른다. 사마천은 조나라의 애국자 인상여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나라의 긴급한 일이 먼저이지 사사로운 은혜나 원한은 나중이다.”(권81 염파인상여열전)
애민애국의 구체적 실천방안으로 사마천은 ‘선공후사先公後私’를 내세운 것이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리사욕으로 점철된 추한 현상들을 목격하면서 진정한 애민애국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사기>를 비롯한 고전 속 애국에 관한 대목들은 거의 예외없이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 민본民本을 그 바닥에 깔고 있다. 백성이 부유하고 행복한 나라야말로 진짜 강한 나라라는 사실을 현자들은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나는 중국이 강해지길 바라지만 그보다 중국의 인민들이 행복해지길 더 바란다.”(대만의 지성 <추악한 중국인>의 저자 백양)
김영수 센터장
영광군청소년상담복지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