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사업으로는 화폐, 문자, 도량형의 통일이 주요 사업이었다. 진시황은 이런 통일사업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하는 인프라 구축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무려 다섯 종류에 달하는 도로망 구축이 가장 중요했다.
군사 전용도로와 황제 전용도로를 비롯한 다섯 종류의 도로망은 통일된 화폐, 문자, 도량형을 전국으로 빠르게 전파하는 네트워크 구실을 했다.
무리한 측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의 토목사업, 그 중에서도 도로 건설은 경제를 염두에 둔 장기적 안목에서 나온 국책사업이었던 셈이다.
이런 점에서 진시황의 도로망 구축사업은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통신망이 역참과 봉수대 정도로 국한돼 있던 시대에 도로망 구축은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절대적인 인프라였다.
또 각지의 생산품을 전국적인 규모로 전달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구축해야 할 국가적 차원의 인프라였다.
진시황의 통일정책과 경제
다양한 형태로 구축된 도로망을 따라 통일된 화폐와 문자 그리고 도량형이 보급되고 각지의 다양한 산물이 전국적 규모로 교환됨으로써 국가경제 활성화에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요컨대 진시황의 도로망 구축은 7배 가까이 커진 통일제국의 경제 활성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었고동시에 각종 통일사업을 효율적으로 빠르게 완수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프라였다.
진나라는 진시황의 통일 이전부터 점령지역의 사업가들을 타 지역으로 이주시켜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앞선 경제정책을 선보였다. 이런 경제정책은 훗날 진시황에게도 영향을 줘 진시황이 기업가들을 우대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촉 지역에서 제철업으로 크게 사업을 키우고 부호가 된 탁卓씨 집안은 진나라가 조나라를 격파한 다음 이주시킨 사업가였다. 탁씨는 촉 지역의 경제적 상황과 지리 등을 면밀히 살핀 끝에 광산이 있는 임공으로 이주해 사업을 크게 일으켰다. 탁씨는 노비 1천명을 거느리며 살 정도로 사업을 키웠으며 그가 사냥을 가거나 고기잡이를 나갈 때의 모습은 왕에 버금갈 정도로 대단했다고 한다.
기업인 이주와 진시황의 기업인 우대
정정이란 사업가는 산동에서 이주한 포로 출신이었다. 그 역시 임공에서 제철업을 했는데오랑캐들과 교역을 해서 치부했다. 그 부가 탁씨에 버금갈 정도였다.
완 지역의 공씨는 위나라 출신으로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한 다음 그를 남양으로 이주시켰다. 남양지역에도 광산이 많았기 때문에 공씨는 광산업에 종사해 거부가 됐다. 그는 자신의 부를 이용해 제후들과 교류해 사업을 더 크게 늘렸다.
제후들에게 늘 비싼 선물을 아낌없이 제공해서 유한공자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씀씀이가 헤펐지만 권력자들과의 관계 형성에 따른 이익이 훨씬 컸으므로 남양지역의 사업가들이 모두 공씨의 큰손을 본받으려고 했다.
사업가들을 각지로 이주시켜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는 이 같은 정책은 통일후에도 지속되었다. 오지烏氏 지방의 나라는 사람은 목축으로 치부했는데 이를 밑천 삼아 진기한 물건이나 옷감 따위를 사서 융족의 왕에게 바쳐 그 보상으로 가축을 받아 사업의 규모를 점점 불려 나갔다.
그가 키운 가축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가축을 셀 때 마리 단위로 세는 것이 아니라 가축이 있는 골짜기를 세야만 했다. 진시황은 이런 나씨를 군君의 작위를 받은 자들과 동등하게 대우했고 정기적으로 다른 대신들과 조정에 들어와 조회에 참석하는 특권까지 부여했다.
여성 사업가 청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주에 자세히 다루기로 하겠다.
김영수 센터장
영광군청소년상담복지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