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80여년 인생이 곧 새마을운동이었다”
“내 80여년 인생이 곧 새마을운동이었다”
  • 영광21
  • 승인 2013.10.17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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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래 / 전 전라남도새마을협희회장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통화연결음까지 새마을노래로 지정해 놓은 김성래(77) 전 전라남도새마을협의회장.

김 전회장은 “내 팔십 평생의 인생 그 자체가 새마을운동이나 다름없다”고 말하며 웃음 짓는다.
새마을운동이 한창 전성기이던 1971년 새마을운동을 시작했다는 김 전회장은 이에 앞서 새마을운동에 투신하게 된 계기를 설명한다.

염산면 두우리의 제법 유복한 집안에서 딸 6명에 이어 귀하디귀한 아들로 태어났던 김 전회장은 군부독재시절 마을주민들이 두우리 바다를 빼앗긴 사건을 시작으로 공동생활과 사업의 개념을 배우게 된다.
김 전회장은 “당시 한 군인이 불법으로 두우리 바다를 허가를 내고 마을주민들이 어업을 못하도록 막자 마을주민들이 나를 찾아왔다”며 “서울에서 공부를 하다 잠시 내려와 있었는데 사람들이 나를 ‘눈 뜬 사람’이라고 하면서 도와주라고 하더라”고 회상한다.

그래서 주변에 조금 젊은 사람들을 모아 바다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를 시작한다. 날마다 군인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형무소 생활을 하면서도 다시 몸을 일으켜 현장으로 나갔다.
그러기를 7년동안 반복하다 마침 소송을 통해 바다를 되찾았고 이 일을 계기로 다 같이 잘사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새마을운동을 시작하게 된다고.

김 전회장은 “당시 주민들은 공동으로 무엇을 한다는 것에 상당히 생소해 했고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의식이 팽배할 정도로 못 먹고 못 살던 때였다”며 “그래서 나부터 실천하고 모범을 보이기 위해 날마다 저녁에 혼자 나가서 한 뼘씩 길을 내기도 할 정도로 열성이었는데 나중에는 그 모습을 보고 다들 따라주더라”고 말했다.

이어 “나로 인해 집안이 불행해지는 등 어려움이 왜 없었겠느냐. 다만 나와 가족이 희생하더라도 내 고향 두우리가 워낙 가난했던 것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지도자로서 일을 한 것뿐”이라 말하며 눈물을 글썽인다.

이 같은 행보로 그는 영광군새마을협의회 초대회장과 전남도새마을협의회 2~3대 회장을 역임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새마을운동과 함께 한 일생은 ‘두우리 녀석들’이라는 드라마로 제작돼 얼마전 대통령기록관에 영구 보관되기도 했다.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김성래 전회장은 자신의 인생을 한마디로 표현한다.
“인생의 굽이굽이 고생을 한 사람은 참 잘살았다고 할 수 있다.”
이서화 기자 lsh1220@yg21.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