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덕분에 뒤늦게 요양보호사가 됐지”
“아내 덕분에 뒤늦게 요양보호사가 됐지”
  • 영광21
  • 승인 2014.02.27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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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만 어르신 / 요양보호사

“아직도 ‘뭐한가’하면서 문을 열고 방안에 들어서면 그 사람이 이 자리에 앉아 있다 대답할 것만 같아요.”
홍농읍 진덕리에서 평생을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최하만(73) 어르신은 지난해 11월말 부인과 사별했다. 13년 넘는 세월동안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내의 병수발을 해왔던 터라 아내가 돌아가셨을 때 시원했을만도 한데 시원하기는커녕 더욱 그리움에 사무쳤다.

최 어르신은 “내 몸뚱이 하나만 편할 뿐이지 집사람이 없을 때보다 훨씬 못해요”라며 “선배들이 달이 가고 해가 가야지 괜찮아 질 것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꼭 맞다”고 말끝을 흐린다.
덤덤하게 말을 잇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에 먼저 간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덜어내지 못하는 최 어르신이 눈시울을 붉히게 한다.

최 어르신의 칠십 평생은 그저 평범한 농사꾼의 삶이었다. 누구나 그렇듯 변변찮은 외출복도 없고 한끼 떼우기도 힘든 시절 학교에 다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 어르신도 그랬다.
“국민학교도 제대로 못 나왔지”라는 최 어르신이 요양보호사 공부를 시작한 것은 긴 세월 병을 앓았던 아내 때문이었다.

사람들에게 “적어도 이 병실 한칸은 내가 병원비로 쓴 돈으로 지은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셀수 없을 정도로 많이 병원을 드나들었다.
최 어르신은 “아내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당뇨병과 여러 합병증을 앓으면서 갈 때까지 병원으로, 집으로 수십 차례 드나들었다”며 “그 사람 병수발을 하다 보니 자격증을 취득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칠십이 넘은 나이에도 공부를 하게 됐다”고 이야기한다.


아내가 돌아간 뒤에도 자격증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칠십의 농사꾼이 책을 읽고 외우고 공부를 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최 어르신은 “나라고 공부가 안 힘들었것소. 방금 배우고 돌아서면 까맣게 잊어버려. 그래서 혹여나 시험에 떨어질까봐 집에 오면 상을 펴놓고 앉아서 열심히 공부했지”라고 말하며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는 누구보다 머릿속에 콕 박히게 교육해 준 선생님들 덕분이라고 수차례 강조한다. 교육생중 최고 연장자로 쉽지 않은 공부를 해내도록 도와준 많은 사람들이 은인 아닌 은인이 됐다.
최 어르신은 “선생님들이 없었다면 내가 요양보호사 자격을 취득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생각보다 오래 살아준 아내처럼 요양보호사로서 다른 사람들도 건강하게 살다 갈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아내를 위해 요양보호사가 된 한 남자가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고 싶다는 느리지만 늦지 않은 꿈을 꾼다.
이서화 기자 lsh1220@yg21.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