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갑에서 태어난 비운의 천재 강 항 선생
불갑에서 태어난 비운의 천재 강 항 선생
  • 영광21
  • 승인 2014.07.31 13: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 성리학을 전수한 수은 강 항 ①

(사)동양문헌학회(회장 안진오)가 29일 불갑면 내산서원에서 <수은 강 항 선생의 학문과 사상>이라는 주제로 학술발표회를 개최했다. 이날 발표회에는 진주강씨 문중, 전남지역 각 향교 전교 등 50여명이 참석해 강 항 선생의 학문과 사상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본지에서는 동양문헌학회가 강 항 선생의 대표작인 <간양록>과 문집 등에 대해 연구한 학술자료중 김장수 광주유교대학 교수의 글 일부분을 발췌해 게재한다. 이 글에서는 강 항 선생의 일대기와 일본에서의 그의 행적과 성리학을 전수하기까지의 과정 등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다.
/ 편집자 주

우리는 우리 민족사에 가장 치욕적인 임진·정유재란에서 근왕의병을 일으켜 강토를 보전하고 호남이 국가의 울타리로 행주대첩, 이치대첩, 명량대첩의 주역으로 성주와 개령을 회복하고 진주성 1차 싸움에는 2,000병력으로 승리토록 지원했고 계사년 진주성 2차 싸움에서 수많은 호남의병이 영남 사민과 함께 순절했다.
1593년 봄에는 경상도에 종자곡식 2만석을 왕명으로 지원했고 의주행재소에 5,000석의 군량을 조달했으며 영남의 곽재우 의병소에 100석을 지원하는 등 국난극복에 피와 땀을 바쳐 난후에 민생이 도탄에 빠지기도 했다. 특히 1597년 정유재란의 참화는 항왜의 지역적 편중을 드러내듯 임진란 초기보다 잔학성이 훨씬 심해 호남의 귀중한 인명과 재산은 물론 문화재의 약탈과 방화 등 참화를 겪었다.

수은 강 항 선생(1567~1618)은 조선조 중기에 이 고장 불갑면 금계리 유봉마을에서 태어난 비운의 천재이다. 맹자정이니, 강목촌이니 하는 전설속의 천재로 문과급제에도 불구하고 한직에서 정유재란을 당해 남원에서 소임을 다하다가 패전해 가족들과 피난가던 뱃길에 칠산도 부근 염산 논잠포 연안에서 붙잡혀 1597년 9월 일본의 포로가 됐다. 1600년 5월 부산 앞바다로 귀국할 때까지 억류된 몸으로 일본의 지도나 관직체계 등 적정을 우리 조정에 알리고 조선의 유학을 일본에 전했다. 구체적으로 사서오경과 곡례전경, 소학, 근사록, 통서정몽 등 16종의 정주학과 조선의 과거제도, 석전제례, 향음주례 등을 후지와라 세이카와 아카마스 히미치로에게 전했다.



일본 성리학의 아버지 강 항 선생

일본의 내각문고에 소장돼 있는 <강항휘초>라고 불리는 수은 선생의 필사본이 16종 21책이나 돼 그 실상을 뒷받침하고 있다. 수은 강 항 선생의 행적이 국내에 알려져 중국 한나라 소무, 송나라 문천상의 충절에 비견되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1990년 에이매현 오오즈시에 <홍유강항 현창비>를 세워 수은 선생을 일본유학의 개조인 등원성와의 스승으로 받들어 일본 성리학의 아버지로 추앙하고 있다.

일본이 1925년 명치유신 이전까지 그들의 사상적 기초를 이룬 화和사상을 수은 선생에게서 전수받은 것임을 확인하는 현창비가 오오즈시에 있다는 것은 왕인박사 이후 가장 위대한 문화전도사임을 말해주고 있다.
근래 일본의 지나친 우경화는 물론 국내에서조차 임진왜란의 역사적 진실을 호도하려는 일부 몰지각한 정치세력에 의해 호남선현의 절의정신이 퇴색돼 가고 있음을 개탄하면서 수은 선생이 조선 유학을 일본에 전했던 경과와 국내 일부인사의 오해 사례에 대해 살펴본다.

조선선비가 일본스님에 유학 전하다
일본은 우리의 백제시대 서기 592년 추고천황 여제가 들어서자 섭정을 맡은 성덕태자가 604년 17개조의 율령을 반포해 왕권을 강화하고 선진문화를 받아들이고자 수나라, 백제 등과 교류했다. 그 후 1459년부터 연이어 3년간 재난과 흉년이 거듭되자 1467~1477년에 이르는 근 10년간 소위 웅인의 난이 일어나 열도 전체가 100년간 무사들의 군웅할거의 시대가 전개됐다. 이를 평정한 오다노부나가와 우호관계에 있던 풍신수길은 돗도리성과 마까마스성을 차지해 세력을 넓히고 있을 때 오다노부나가는 적군에 포위돼 혼노사에서 자결했다. 그의 뒤를 이어 열도를 통일한 풍신수길이 각 번의 군사력을 조절하고 사위가 되는 대마도주의 원수를 갚아 줄 심산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각 세력간 다툼으로 무력이 강대한 필요한 시기를 당해 호신과 호국의 사무라이를 숭상한 까닭에 그들은 거의 경전에 문외한이었고 승려가 학문을 전수하는 계층으로 발전해 임제종, 선거5종, 정도진종, 법화종 등의 승려들이 지식전도의 임무를 전담했으며 웅인의 난 이후 군웅할거시대에 더욱 심했다.
그러기에 승려들은 지식층의 특권을 누렸고 각종 외교관계의 행사를 돕거나 전담하는 일이 많다보니 정치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었다.

그 후로도 무사우위의 사회기본정책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무사나 부유층 시민 중심이었던 학문이 차츰 일반 시민중심으로 발전해 수은 강 항 선생께서 후지와라 세이까, 아까마스히미치로 등에게 조선유학을 전한 이후 약 120년이 되던 1722년 에도부내 약 800여개의 데라코라라는 절간속의 글방이 생겨났으니 데라코야는 우리나라의 서원과 비슷한 존재로 공부방이 절에 있다는 점만 다르다.
일본에서는 1641년 오카야마 번의 이께다와 유학자 구마자와가 협의해 하나바타케 교장이라는 학교를 세운 이래 각 번에 데라코야가 점차 교장으로 바뀌기도 해 240여개의 학교가 설립돼 유학과 의학, 무술 등을 가르쳤다.
에도막부시대에는 번 단위로 일종의 지방분권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평온을 유지해 오다 1868년 8월 아이즈와 싸쓰마번이 협력해 존왕양이파를 물리치고 명치유신시대에 접어들기까지 일본유학의 주류인 화和 사상은 실로 수은이 전한 중용의 사상이 기본이다.
▶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