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성리학을 전수한 수은 강 항 ②
일본 성리학을 전수한 수은 강 항 ②
  • 영광21
  • 승인 2014.08.07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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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항 선생, 일본 성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다

▲ 사진은 2009년 3월 당시 정기호 군수가 일본 애히메현 오오즈시를 방문하고 상호 교류협력방안 등을 논의하고 촬영한 기념사진.
1980년도에 방영됐던 인기드라마의 주제곡인 <간양록看羊錄>은 가수 조용필이 불러 크게 히트했던 대중가요였다. 이 노래의 제목인 간양록은 조선중기의 유학자 수은 강 항이 1597년 정유재란 때에 일본에 포로가 돼 끌려가 고향땅을 그리며 쓴 일기형식의 기록이다. 최근 일본의 한 도시에서 강 항 선생을 가장 주목할 만한 역사적 인물로 평가하고 있어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일본에서의 수은 선생 추모
2002년 2월에 오오즈시에서는 특별한 만남이 있었다. 일본의 오오즈시 시청에서 친선교류를 목적으로 영광군청 사람들을 초청한 것이다.
두 지역이 인연을 맺은 것은 영광출신의 한 조선인 선비 때문이다. 정유재란으로 포로가 돼 오오즈시에서도 잠시 머물러 그들에게 조선유학을 전해 준 인물이 수은 강 항이기 때문이다. 오오즈시 시민들의 수은 선생에 대한 관심은 오오즈시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고 한다.

1990년 에이매현 오오즈시 시민회관 앞에는 수은 선생을 기리기 위한 현창비 <홍유강항현창비>가 세워져 있었다. 현창비 옆에는 강 항을 소개하는 글을 새겨놨는데 강 항을 ‘일본 성리학의 아버지’라고 표현하고 있다. 일본 성리학의 아버지! 이것이 일본의 오오즈시에서 강 항을 기억하고 기리는 이유다. 강 항의 이름은 오오즈시의 초등학교 교재에도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오오즈시의 향토사학자인 무라카미 쓰네오씨는 <강항연구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강 항이 남긴 문집과 자료를 수집해 강항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왔다고 한다.
오오즈시 사람들이 강 항이라는 인물에 대해 이렇게 빠져든 이유는 무엇일까.
무라카미 쓰네오는 “강 항 선생이 이렇게 일본에 수준 높은 학문을 전해주었다는 것을 알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 분을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인들은 이분에게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생각으로 10년간 열심히 공부했다”고 말했다.

포로가 돼 일본으로 끌려간 강 항 선생
강항연구회의 강 항 선생에 대한 연구는 다각도로 이뤄지고 있다. 그동안 강항연구회에서는 강 항의 발길이 닿았던 곳을 직접 답사해 유적지로 발굴해내기도 했다. 나가하마항구는 수은 선생이 포로가 돼 일본에 처음 도착했던 항구이다.
무라카미 쓰네오는 “포로가 된 강 항 선생 가족일행은 배를 타고 이곳에 닿았다. 당시 이 해안에는 항구가 없었다. 이 히지천을 거슬러 올라가 약 2㎞ 떨어진 현재의 나가하마시 시모스가이 주변이 당시의 포구였다. 아마 그곳에 상륙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포구에 도착한 강 항은 지금의 히지천을 지나 오오즈성으로 향하게 된다. 강항연구회는 이렇게 얕은 하천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발굴할 정도로 강 항에 대해 정성을 쏟고 있다.
강 항이 지났던 히지천 옆길에는 나무표지판을 세워 강 항과 인연이 있는 땅이라는 표시를 해뒀다. 그리고 나무표지판 옆에는 강 항의 한시를 새겨놓았다. 오오즈시 사람들은 이렇게 정성스레 400년전의 조선인 선비 강 항을 기리고 있다. 일본 오오즈시의 초등학생들이 사용하는 부교재에는 반쪽분량으로 강 항에 대한 소개가 돼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알고 있나
그러나 강 항은 현재 한국인들에게는 그리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더구나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성리학 분야에서 일본에 영향을 끼친 인물은 퇴계 이 황 선생으로 잘못 알고 있다.
그것은 국내에서 맨 처음 1989년에 수은집이 전라남도에서 현암 이을호 주관으로 국역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과정에서 현암의 서문에 일본에 주자학을 전한 강 항을 주자학 대신 퇴계학이라고 바꿔 표현한데서 기인한다.

그것은 퇴계(1500~1570)와 수은(1567~1618)이 종유한 흔적이 없고 영광의 염산 논잠포 갯벌에서 붙잡혀 포로가 될 당시 상황을 유추하면 분명한 사실이다. 수은 선생이 포로가 될 당시 그 어떠한 도서류를 지닌 것도 아니고 오로지 기억력에 의해 사서오경 정몽 근사록을 포함해 우리의 석전제례, 과거제도, 향음주례, 사상견례 등을 필사한 16종의 도서 21권이 남아 그들이 보존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또 귀국 후 고향 영광에서 보낼 때 영광군수로 부임한 팔송 윤 황과 인연으로 그의 아들들을 가르치게 됐고 포로로 끌려가기 전에는 그를 포함한 누구도 퇴계의 학맥과 관련이 없다.

물론 강 항 선생 연보에 의하면 일본에 끌려가기 전 1594년에 동인들에 의해 탄핵을 받아 교서관 분관으로 밀려났을 때 우계 선생을 찾아 뵌 일이 있었다.
우계 성 혼이 퇴계의 성리학이론을 일부 수용했다 가정해도 우계가 퇴계와의 서신 몇통으로 제자가 될 수 없듯이 수은 선생 또한 저어당 강해 선생에게 수학했는데 현암 이을호 선생이 편집한 연보에 저어당은 율곡문인이라고 적고 있기에 1570년 퇴계 서거 당시 겨우 4살인 수은이 퇴계 개인의 학문을 전했다고 하는 것은 무리다.

한국공자학회에서 펴낸 <현암 이을호 연구>에서도 안동교 교수의 논의제기가 있었지만 현암이 주자학 대신 퇴계학이라고 표현한 것은 한국유학의 상징성을 두고 말한 것으로 알고 있다.
현암의 다른 글의 예를 들어 경전의 한글화에서도 주자학이라는 어휘에 신중했던 점을 유추하면 1989년에 현암 선생이 국역 수은집 서문에서 “후지와라 세이까에게 퇴계학을 처음 강론 운운…”이라 표현한 부분은 독자들이 공자께서 말한 유과지중구무과有過之中求無過(허물이 있는 가운데 허물이 없는 것을 구하다)의 심정으로 이해의 폭을 넓히면 한국유학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