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성리학을 전수한 수은 강 항 ③
일본 성리학을 전수한 수은 강 항 ③
  • 영광21
  • 승인 2014.08.21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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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항 선생은 어떻게 일본으로 끌려갔을까

강 항이 일본으로 끌려가게 된 과정은 그가 남긴 저서인 <간양록>의 적중봉소에 자세히 기술돼 있다.
간양록에 의하면 강 항이 일본으로 가게 된 것은 1597년, 그의 나이 서른살 때였다. 당시 형조좌랑의 벼슬에 있었던 강 항은 잠시 휴가를 얻어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그때 조선에 전쟁이 일어난다. 1592년에 20만 병력을 파견해 조선에 쳐들어왔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시 조선에 대한 재침을 시도한 것이다. 정유재란이었다.

남원성을 함락 당한 정유재란
정유재란은 임진란 이후 전쟁이 소강상태에 머물렀을 때 명나라와 일본이 화친을 운운하면서 밀고 당기는 사이 왜적들은 포항에서 승주해룡에 이르는 동남해안에 15~16개의 왜성을 축조하고 임진란에 정복하지 못한 전라도를 점령해 군량확보를 도모할 심산으로 부산 등 남해안을 거쳐 전라도지역으로 밀고 들어와 남원을 우선 집중 공략하는 것이었다.

5만6,000여 왜적이 남원성을 공격해 전라병사 이복남 등 민관 3,000여명이 항전했으나 3일만에 성안에 17가구의 민가만 겨우 남았을 정도로 만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또 인근 지역으로 가서 살인, 향교·사찰 등 문화재 방화, 재물약탈 등 분탕질을 쳐 그 피해는 헤아릴 수 없었다. 당시 왜군이 임진년에 호남을 정복하지 못했던 분풀이로 저질렀던 만행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자세히 묘사돼 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의 목을 베기도 하고 손발을 잘라내기도 했다. 그리고 노약자와 어린아이들도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죽였다. 남원에는 지금도 만인의총이 전해온다.

이순신에게 향하다 왜군에 잡혀
강 항은 이광정의 종사관으로 남원성에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 영광지역의 양곡을 모아 남원성으로 운반해 가고 있었다. 고향집에 있다가 왜군의 침략소식을 들은 강 항은 남원으로 향했다. 패전을 확인한 후 서해로 북상을 작정했다. 강 항은 영광으로 돌아와 김상준과 함께 격문을 띄워 의병 수백명을 모았지만 왜군의 기세 앞에 의병은 곧 흩어졌고 영광도 왜군에 유린당했다. 강 항은 집안 식솔들을 배에 태워 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의 진영으로 향했지만 떠난지 9일 만에 왜군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강 항은 배 두척을 구해 식량을 싣고 가족들과 함께 칠산도로 향하던 중 염산의 논잠포 부근에서 왜군의 군선들에 의해 포위된다. 강 항은 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많은 식솔들이 왜군의 칼에 죽임을 당했다. 이 와중에 강 항은 어린 자녀들이 왜군에 살해되는 아픔을 겪는다. 그렇게 포로가 된 강 항 일가족은 일본으로 끌려가게 된다. 순천을 지날 즈음 탈출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이후 더 심해진 감시 속에 강 항 일가족은 힘겨운 여정을 계속했고 결국 10여일 만에 일본 오즈시에 도착한다.

강 항은 쓰시마섬과 이키섬 등을 거쳐 시코쿠지방 이요의 오즈성으로 끌려갔다. 강 항을 사로잡은 장수가 오즈성의 성주인 사도의 부하 노부시치로였던 것. 당시 사도의 상관은 남원성 전투에 참가하고 명량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패한 도도 다카토라였다.

강 항 선생을 일본으로 끌고간 일본
강 항 일행이 바다를 건너는 도중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강 항의 여덟살 난 어린 조카가 구토와 설사를 하며 병이 나자 왜군들이 바다에 던져 버리기도 했다. 바다에 던져진 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가 오래오래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강 항은 오즈성에서 한양을 방문한 적이 있다는 슈세키지의 승려 요시히도와 친교를 맺기도 하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히기도 했다. 1598년 강 항은 오사카를 거쳐 교토의 후시미성으로 이송됐고 그곳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일본으로 끌려온지 약 1년8개월이 지난 1600년 강 항은 남은 식솔들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이미 400년전의 전쟁이지만 당시 기록이나 그림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처참하게 목숨을 잃었는지 실감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당시 일본군은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까지도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죽였다. 그런데 어째서 강 항은 죽이지 않고 애써 일본까지 끌고 간 것일까.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은 당시 조선의 서적이나 목판 활자본, 공예품 등 문화재를 약탈하는데 주력했다. 그리고 일본군의 포로가 돼 압송된 조선인의 수만도 10만명에 달했는데 그들 대부분은 도공이나 공예 기술자들이었다. 조선의 선진기술을 약탈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강 항과 같은 지식인들도 상당수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렇다면 도공이나 공예 기술자들처럼 특별한 기술이 없는 조선의 지식인들을 포로로 끌고 간 이유는 무엇일까?

성리학에 관심 많았던 일본 승려들
대륙침략의 야욕을 가지고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집권하던 16세기 중엽 무사들은 중요한 재원이었다. 따라서 이미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 무사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집권한 후에 일본사회의 막강한 세력이 됐다.
일본 유학자 미조부치 요우조는 “강항이 포로로 끌려갔던 무렵의 일본은 무력의 시대로 말하자면 야만의 시대였다. 당시 부모와 자식이 서로 적이 돼 싸우기도 했고 형제간에도 적으로 싸우던 상황이 계속됐다. 유학의 도덕적인 차원에서 보면 당시 일본은 서로를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말했다.

<간양록>에 의하면 그 시대 일본사회의 권력자였던 무장들은 글을 몰라 병서 한권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일본의 유일한 지식인들은 승려였다. 일본 승려들은 불교경전 이외에 다양한 학문을 연구했다. 그래서 당시 일본의 승려들은 의사, 역술인, 외교관의 기능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일본의 승려들중에는 성리학에 관심있는 승려들도 많았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는 성리학이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 이에 비해 유교를 국교로 삼은 조선에서는 성리학이 생활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