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항은 자신의 형 강 준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는데 형 강 준 역시 율곡 이 이의 학맥을 잇는 인물이다.
강 항이 일본에 끌려가기 7년 전인 1590년 조선통신사의 방일 모습을 그린 그림을 자세히 보면 말을 탄 조선통신사가 일본인에게 글을 써주는 장면이 보인다. 이때 조선통신사의 기록을 보면 “일본의 현소라는 스님에게 글을 써줬더니 그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져 글을 구하는 자들이 숙소 앞에 구름처럼 몰려들었다”라고 쓰여 있다. 이는 당시 일본인들이 조선의 앞선 문화에 대해 갈증을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특히 성리학의 경우 조선은 정치이념뿐 아니라 백성들의 생활 깊숙이 주자학, 즉 성리학의 사상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런데 일본은 일부 승려들만이 접할 수 있는 학문이었다. 그러다보니 일본에서는 강 항과 같은 선진 지식을 가지고 있는 학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지식인들에게는 다른 포로들에 비해 특별한 대우를 해줬다. 포로 신세가 돼 일본으로 끌려온 강 항은 오즈시에 정착한다. 일본의 무장들은 그에게 2층 누각의 집을 선사하고 시종을 들어줄 하인까지 배치시켜 줬다. 그러나 강 항은 쉽게 일본사회에 동화되지 않았다.
그는 슛세기사의 승려들과 학문을 논하면서 언제나 조선 선비로서의 복장을 하고 절도있는 유학자다운 품위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간양록>에 의하면 강 항은 자주 오즈성 성루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
일본에서 높이 평가받은 강 항
결국 강 항은 탈출을 시도한다. 교토에서 도망친 한 조선인 포로를 만나 서쪽으로 빠져나갔다. 그러나 왜병들에게 발각돼 처형당하는 위기에 처한다. 처형되기 직전 오즈성의 성주인 도도 다카도라가 갑자기 강 항의 처형을 중지시키라는 명을 내려 그는 간신히 목숨을 구하게 된다. 강 항과 친분을 쌓았던 킨잔 슛세기사의 승려 카이케이는 다카도라가 존경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탈출을 시도한 조선인 포로들을 극형에 처했던 일본인들이 강 항에 대해서만큼은 관대했던 것은 그만큼 강 항의 학문을 높게 평가했고 그의 지식을 전수받으려고 애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강 항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일본어조차 배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가운데 교토에 거주하고 있던 후지와라 세이카라는 승려가 강 항을 찾아와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공부하게 된다.
언어가 통하지 않았던 두사람은 필담을 통해 성리학에 대해 토론했다. 강 항은 성리학을 무척 배우고 싶어했던 후지와라 세이카를 위해 특별히 사서오경 왜훈을 작성해주고 조선의 과거제도, 석전제례, 향음주례 등을 전수했다.
일본 오즈시에는 에도시대의 건물이 하나 남아있댜. 공자의 목상이 안치돼 있는 ‘테라코야’라고 불리는 이 건물을 조선의 서원처럼 일본에서 성리학을 가르쳤던 곳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어 일본의 패권을 휘어잡은 도쿠가와 이예야쓰는 에도막부를 열고 사회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신분계급을 확실히 정하고 성리학에 의한 인간관계를 확립시키는 것에 주력했다. 즉 전쟁의 시대를 마감하고 평화의 시대를 열고자 한 것이다.
후지와라 세이카라의 스승이 되다
도쿠가와 이예야쓰는 후지와라 세이카를 니조성으로 불러들여 자신의 측근이었던 승려 세이쇼 조타이와 유불논쟁을 벌이게 했다. 유불논쟁을 통해 이예야쓰는 구체적으로 유교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에도시대 이후 테라코야라는 학교가 세워지고 그곳에서 성리학을 가르치게 된 건 유불논쟁의 성과였다. 세이카로 인해 비로소 일본사회에 성리학이 보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후지와라 세이카로 인해 일본사회에 성리학이 뿌리내렸다면 성리학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씨를 뿌려준 사람이 바로 강 항이다.
무라카미 쓰네요가 말하기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총과 칼을 앞세워 이웃나라 조선을 침략했다. 그러나 강 항 선생은 학문으로 일본에 위대한 교육문화를 전수해 줬다”라고 했으니 수은 선생은 왕 인 박사 이후 가장 위대한 한일간 문화전도사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성리학의 출발에 큰 영향을 미친 수은 선생은 “나는 교토에 온 뒤로 왜국 실정을 알기 위해 왜승들과 교제했다. 그중에는 글도 알고 이치도 아는 자들이 없지 않았다. 의원 노릇도 하는 이들도 가끔 나를 찾아왔다”고 <간양록>에 적고 있다.
또 “묘수원의 순수좌는 후지와라노 데이카의 자손으로 다지마 성주 아카마쓰 히로미치의 스승이다. 총명해 옛글도 잘 알아 통달하지 않은 글이 없었고 성격이 강직해 왜인들 사이에 잘 끼지 않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의 재주가 뛰어나다는 것을 듣고 교토에 집을 짓고 해마다 쌀 2,000석을 주고자 했다. 그러나 순수좌는 집도 쌀도 받지 않고 다만 기노시타 가쓰토시(오바마성 성주)나 아카마쓰 히로미치와 교류할 뿐이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주목할 인물은 교토 쇼코쿠지 묘수원의 선승인 순수좌, 즉 후지와라 세이카(1561~1619)이다. 그는 일본에도 유학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인물로 그를 불러 <대학>을 강의하게 하자 승복이 아닌 유학자의 복장을 입고 나타났다. 불교수좌의 지위를 버리고 온전한 유학자로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유학은 대부분 승려들이 공부했으며 유학의 위치도 불교의 보조적인 학문에 머무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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