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때처럼 시절이 하 수상하다
경술국치 때처럼 시절이 하 수상하다
  • 영광21
  • 승인 2015.09.03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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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29일 일부 지방자치단체나 학교 앞에는 여느 때와 다른 모양의 국기가 내걸렸다. 깃폭만큼 내려서 단 조기형식이다. 나라의 큰 슬픔이나 애국선열을 기리는 날도 아닌데 왜일까? 105년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국치일이다.
큰 슬픔 못지않게 큰 부끄러움 역시 머릿속에 새겨야 한다는 다짐에서 그런 것이다.
일본에 의해 강제로 체결·발효된 한일병탄조약은 경술년인 1910년 8월29일에 일어난 치욕스러운 사건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원인이 됐다.
전국 일부 시민단체에서는 일본에 나라를 잃은 슬픈 날을 되새기기 위해 경술국치일에 조기게양을 하도록 독려하기도 했다.
그런데 광복회 대전충남연합지부가 한일병탄조약 발효일에 맞춰 경술국치추념행사를 하면서 조기가 아닌 축하용 태극기를 흔들어 눈총을 받고 있다. 광복회 대전충남연합지부(지부장대행 오연우)는 한일병탄조약이 발효된 지 105주년이 되는 지난 8월28일 오전 11시 대전시청 앞 보라매공원에 ‘경술국치 추념식 및 일본아베정권규탄대회’를 열었다. 역사인식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가 빚은 웃지 못할 촌극이다.
국치일은 일제가 대한제국에게 통치권을 일본에 양여함을 규정한 한일병탄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이를 공포한 경술년(1910년) 8월29일을 일컫는 말이다. 국가적 치욕이라는 의미에서 경술국치라고 부르며 일제는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것에 대해 자신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한일합방, 한일합병 등의 용어를 썼다. 국권피탈이라고도 한다.
1910년 8월22일,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합병조약이 강제로 체결됐다. 대한제국의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8월29일 조약이 공포돼 대한제국은 국권을 상실하게 됐다. 이로써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실질적 통치권을 잃었던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에 편입됐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됐다.
합병 당일 대한제국 황제 명의의 성명서는 “정사를 혁신하고자 많이 애썼지만 나아질 가망이 없어 결단을 내려 통치권을 양도한다”고 돼있다. 물론 일제의 강압 때문이었지만 이미 나라를 지킬래야 지킬 수단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 5년전 을사늑약으로 주권의 상징인 외교와 군사권을 빼앗겨버렸다.
저항할 최소한의 물리력도, 도와줄 우방도 없었다. 일제는 이미 주변 열강, 러시아와 영국, 심지어 미국의 암묵적 동의까지 얻어낸 뒤였다. 당시 일본은 그만큼 치밀하고 집요했다. 봉건적 기득권과 왕권 지키기에 급급했던 그때 지배세력으로선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근대사의 이런 고통스런 기억들을 다시 들춰내 되새겨야 한다는 경고들이 많다. 동북아를 휩쓴 역사의 격류가 100여년 만에 재현되는 조짐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G2로서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견제, 일본의 재무장과 북한의 좌충우돌 등 변수가 어지럽다.
100여년 전과 많이 다르다지만 우리 힘이 미치지 못하는 어쩔수 없는 한계들이 많다. 결연하게 나설 때와 참고 견디며 물러서야 할 때를 잘 분별해야 한다. 역사인식이 그런 지혜를 길러준 것이다.
경험이 공유되고 기억이 계승될수록 그 사회는 튼튼하다고 한다. 보편적 역사교육은 그래서 치명적으로 중요하다. 광복 이후 지난 70여년 위대한 여정을 이어갈 새로운 도약은 다시 역사적 성찰과 모색으로부터 찾아져야 한다. 국치의 부끄러움을 오늘 우리가 되새기는 이유이다.

박 찬 석 / 본지 편집인oneheart@yg21.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