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성 담보한 법성포연날리기 부흥을 꿰하자
역사성 담보한 법성포연날리기 부흥을 꿰하자
  • 영광21
  • 승인 2005.01.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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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설맞이 영광군 연날리기 대회를 앞두고
우리의 전통 민속놀이 중에 가장 많은 사람이 즐겼던 것은 연(鳶) 날리기가 아닌가 싶다.
겨울철이 되면 형형색색의 연을 만들어 아이들과 함께 또는 어른들끼리는 마을별로 구분돼 연싸움을 하는 등 우리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놀이 문화중 하나이다.

그렇게 성행하던 연날리기는 일제의 민족 말살정책과 6·25동란 등 숱한 격동기를 거치며 차츰 사라져 갔고 신물질문명의 발달로 놀거리, 즐길거리가 많아지면서 이미 그 모습을 감춘지 오래다.

연날리기는 인천, 충남 대천, 고창 부안, 목포, 여수, 사천, 통영, 부산 등 주로 바닷가를 끼고 있는 지역에서 많이 성행했는데 우리 지역에서도 특히 법성포의 연날리기는 전국에서 알아 줄 만큼 조예가 깊은 곳이다.

연에 관한 문헌을 보면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진덕여왕의 즉위를 반대하는 반군들과 싸우던 김유신 장군은 연을 이용, 민심을 수습하여 승리로 이끌었고 고려 최영 장군 역시 탐라국(제주도)의 몽고인들을 제압할 때 연을 이용해 성을 공격했다는 설이 있다.

법성포의 연날리기 시점은 조선조 중종 7년에 28개 군현을 다스리는 조창이 건치된 이후 선조때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으로 부임하여 각 조창을 시찰하던중(KBS 역사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방영 때 자막으로 고증됨) 진양포(당시 법성포의 지명)의 진성에 올라가 연날리기를 즐겼다는 고증에 비추어 볼 때 이때부터 법성포 사람들에게 연날리기가 보급됐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조 영조대왕 시절부터 연날리기가 대중화됐다고 기록돼 있으니 법성포 연날리기는 일반 백성에게 알려지기 전에 이미 시작도됐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 장군이 전략상 사용한 31종의 신호연을 만들게 된 근거지 또한 법성포가 되는 셈이다.

연날리기에 대한 추억을 그리워하면서 연날리기 보급과 건전한 놀이문화 정착, 연날리기 동호인의 저변확대의 기치를 내걸고 출발한 <법성포민속연보존회>에서는 청소년 연교실 운영, 각 지역 연날리기 전국대회 출전, 호·영남 비연회 가입 활동, 그리고 단오제에 즈음해 전국연날리기대회를 개최하면서 연날리기 부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컴퓨터와 각종 오락기구에 길들여져 쉽게 연날리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지역주민을 이끌어 내기 위한 방안으로 <제1회 설맞이 영광군 연날리기대회>를 개최한다. 이번 행사는 전통 연싸움(법성포 대울역) 방식으로 순수 동호인들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

수백개의 줄연(창작연)과 각종 문양의 방패연에 을유년 새해의 모든 고민과 시름을 담아 날려보내고 영광군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장려해 나가야 할 연날리기가 다시 재현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강 춘 권 <법성포민속연보존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