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광공공도서관(관장 김순희)이 지난 9월5 ~ 10월31일까지 지역주민과 학생을 대상으로 길 위의 인문학 <인문학, 삶을 아름답게 채우다>를 총 7회 운영했다.
본지는 길위의 인문학 프로그램 중 전남대학교 김동수 교수가 <상사화 피던 날, 수은 강 항과 마주하다>를 주제로 진행한 강의와 불갑면 일대를 탐방한 내용을 요약·정리해 연재한다.
/ 편집자 주
수은 강 항(1567~1618)은 영광 출신의 문신으로 정유재란 때(1597년) 영광 앞바다에서 일본군에 일가족들과 함께 사로잡혀 일본에 끌려가 억류생활을 하다 4년만인 1600년에 귀국했다. 일본에서의 억류생활 중 성리학에 관심이 많은 승려출신의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주자성리학의 내용을 전수함으로써 일본 성리학의 원조로 추앙된 사실로 유명하다. 또한 일본의 여러 정세와 그들의 생활상을 기록해 국익에 도움을 주고자 <간양록>을 저술하기도 했다.
이글은 강 항의 여러 면모들 중 그의 일본에서의 활동을 중심으로 소개해 보려는 것이다.
일본에서의 활동 - 유학의 전수
수은의 일본에서의 억류생활은 2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전기는 시고쿠의 오츠성에서 보낸 시기이고 후기는 오사카를 거쳐 후시미성에서 보낸 시기다.
처음 유치된 오츠에서의 생활은 일부 가족들이 객사하거나 참살당하는 등으로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이에 탈출을 계획했으나 곧 발각돼 처형의 위협까지 받다가 기적적으로 구출돼 다시 오츠성으로 되끌려 오기도 했다.
다만 이후 약 12㎞ 상거인 킷산 슛세키지의 노승 카이케이와 교유하게 돼 그에게 한시를 써주고 그가 소지하고 있던 일본의 기록들을 필사하는 등 일본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던 것 등이 주목할 만한 일이다.
오츠의 영주 도도 다카도라가 조선에서 환국한 이후 오사카로 이주하게 돼 1598년 8월8일 이동을 시작해 9월11일 오사카에 도착했다.
그러다 다시 며칠후 후시미성으로 옮기게 돼 수은의 후반기인 후시미에서의 억류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그런데 이곳에서 후지와라 세이카라는 승려, 그리고 아카마쓰 히로미치라는 성주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후 다츠노 성주 아카마쓰와 친교를 맺었으며 점차 주자학에 대한 관심이 깊어져 1590년 조선통신사로 온 사신 황윤길, 김성일 등 일행이 교토에 왔을때 통신사 사절단과 시문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는데 이때 서장관 허성과 접촉하면서 조선유학에 대해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허성의 글을 읽고 감명을 받은 후지와라 세이카는 본격적으로 주자학을 공부하기 위해 1591년에 큐슈의 사츠마에서 명나라 사신 배에 편승해 중국으로 유학을 가려 했지만 폭풍을 만나실패했다. 그는 다시 조선으로 건너가고자 했으나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으로 인해 꿈을 이루지 못한 이력을 지니고 있었다.
수은 강 항과의 운명적인 만남
이처럼 신유학(주자학)에 대해 강한 탐구심을 지니고 있었던 후지와라는 후시미의 아카마쓰 자택에서 수은과 운명적인 만남을 이루게 된 것이다. 언어가 통하지 않았던 두 사람은 필담을 통해 성리학에 대해 토론하곤 했다.
후지와라는 아카마쓰의 도움을 받아 일본 최초로 주자의 신주에 의한 사서오경의 왜훈본 간행을 계획하고 대자본 사서오경의 필사를 수은에게 의뢰했다.
이 책의 원본은 오늘날 현존하지 않지만 주자학에 정통했던 수은에 의한 정확한 훈점과 주석이 달린 사서오경을 비롯한 신유학의 텍스트는 이후 일본 유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아카마쓰는 이들 신유학 서적의 훈독과 주석사업을 경제적으로 후원했을뿐 아니라 수은 일가의 생활비, 나아가서는 귀국준비도 지원했었다. 그러나 수은이 귀국후 불과 4개월만에 일어난 세키가하라전투에서 도요토미가의 서군에 속했다가 패전함으로써 일가 전체가 멸족되는 참화를 입어 대가 끊어지고 말았다.
후지와라는 아카마쓰의 지원과 수은등 조선에서 온 유학자들의 협력을 얻어 주자 신주에 의한 사서오경 등 경전의 필사와 주석을 진행함으로써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주자학연구에 필요한 기초적 문헌을 완성하고자 했었다. 그러나 이는 아카마쓰의 할복으로 말미암아 끝내 실현을 보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후지와라는 불교 승려에서 벗어나 유자로서 확고하게 전신할 수가 있었다.
주자학을 널리 보급시키다
천하통일을 이룬 일본의 새 지배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종래의 불교 체제를 온존시키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주자학을 새로운 지배이데올로기로 채용했다. 그는 전국통일 이후 에도막부를 열고 사회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신분계급을 확실히 정하고 성리학에 의한 인간관계를 확립시킬 필요성에 주목했다. 일본 근세 봉건사회에 있어 주자학이 지닌 효용성을 통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후지와라 세이카를 니조성으로 불러들여 승려 세이쇼 조타이와 유불논쟁을 벌이게도 했다. 이후 도쿠가와는 후지와라를 불러 종종 정치에 관한 중국의 고전을 강의하게 하는 등 그를 극진히 예우하고자 했다.
그러나 후지와라는 초빙을 거절하고 은거한 채 나오지 않았다.
이후 후지와라는 하야시 나잔을 비롯해 마쓰나가 세키고, 요시다 소안 등의 제자와 더불어 주자학을 강론하는데 힘썼고 박학하면서도 실무 능력에 뛰어난 나잔을 막부에 추천했다.
나잔은 스승의 뜻에 따라 막부에 들어가 주자학을 널리 보급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후 나잔은 4대에 걸쳐 쇼군의 시강이 됐고 외교문서와 제 법도의 초안작성, 막부 행정의 정비에 힘썼다. 또 그가 제자들을 가르친 가숙은 주자학 최고 학부인 쇼헤이코로 발전했고 쇼헤이코에서 배운 제자들은 각 지역 한藩의 유학교수가 됐다.
이 때문에 나잔은 자신의 스승 후지와라를 일러 ‘일본 유학의 남상濫觴’이라 칭송했는데 그 학문적 원조를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수은 강 항 선생이 자리하는 것이다. 현재 일본 오즈시에는 홍유강항현창비가 있는데 비문에는 ‘일본 유학의 아버지 유학자 강 항의 비’라는 비문이 적혀 있다.
또 오즈시의 초등학교 부교재에서도 강항의 유학전래 사실을 반페이지 정도로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다음호에 계속>
김 동 수 / 전남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