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17살에 6·25전쟁이 났어. 정신없이 쏟아지는 피난민들 틈에 껴서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영광으로 왔제.”
6·25 당시 남편의 고향인 대마면으로 피난와서 어느새 60여년이 넘는 세월을 보낸 대마면 원흥리 김정숙(83) 어르신.
15살 어린나이에 시집을 간 김 어르신은 전쟁 당시 남편의 손만 붙잡고 장성에서 영광까지 먼길을 걸어와 지금의 마을에 정착했다.
“친정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나니까 우리 엄마가 우리 형제들을 혼자 키우기가 얼마나 힘들었겄어. 식모살이 보내느니 차라리 시집가서 잘살어라 하고 그 어린나이에 시집왔제”라고 말한다.
김 어르신은 대마면으로 피난온 후 작은아버지의 도움으로 조금씩 농사도 지으면서 삶의 안정을 찾아갔다.
“그때는 남의 집 작은방에 얹혀살면서 땅 몇 마지기 얻어서 농사짓고 살았어. 그때 고생은 말도 못해”라며 “그래도 애기는 다 낳고 살았어”라고 웃는 김 어르신.
김 어르신은 6남매 중 어려서 2명의 자식을 먼저 보내고 아들 셋에 딸 하나를 훌륭하게 키웠다.
“애기를 낳아놓고 나니까 더 이상 피난도 못가고 그냥 여기서 평생 살아야겄다 하고 지금까지 살고 있어”라고 얘기한다.
먹을 것 하나, 입을 것 하나 변변치 않았던 어려운 시절에 김 어르신은 집안을 살리기 위해 꿋꿋하게 버티며 일을 해왔다.
24년전 남편이 간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고 오랜 세월을 혼자 살아오면서 그 시절 그 고난과 고생을 다 겪고 지금은 한결 살기가 편해져 좋다는 김 어르신.
젊었을 적 부지런함이 몸에 배어 여든이 넘은 지금도 농사철이면 일손을 쉬지 않는다.
“봄, 여름, 가을 안 쉬고 일해. 저기 수박밭으로 일 다니면서 돈 벌고 이집 가서 도와주고 돈 벌고 아직도 나는 내가 직접 벌어서 써”라는 김 어르신은 “다리는 아파도 자식들 고생 안시킬라고 벌수 있을 때까지는 벌어야지”라고 말한다.
김 어르신은 가난으로 어려웠던 시절 자식들에게 많은 것을 해주지 못한 미안함이 가득하다.
“겨우 중학교까지만 졸업하고 다 출가해서 지금은 다 잘살아. 난 해준 것이 없으니까 자식들 덕 볼 생각은 안해”라고 얘기한다.
겨울에는 일거리가 없는 김 어르신은 마을사람들과 함께 윷놀이도 하고 화투도 치면서 시간을 보낸다. 또 1주일에 2번씩 건강체조를 배우며 운동도 함께 하고 있다.
“잘은 못해도 시늉은 내면서 하지”라며 밝게 웃는 김 어르신은 “자식들이 잘 사는 것이 내 소원이네”라고 말한다.
은혜정 기자 ehj5033@yg21.co.kr
김 정 숙 어르신 - 대마면 원흥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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