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버림 고 정 종 선생은 동국대, 전남대 교수로서 후학을 위해 애썼을 뿐 아니라 공자학회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우리나라 동양철학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선생은 큰 업적을 이뤘을 뿐 아니라 한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며 사랑했고 끝내 고향으로 돌아와 아이들과 후학들에게 사랑과 애정을 베푼 큰 어른이었다.
특히 6·25 전쟁 직후 영광의 명물이었던 야든이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사람들의 심부름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던 야든이는 물무산에 숨어든 빨치산이 산에 내건 인공기를 태극기로 바꿔 거는 심부름을 하다 총탄에 사망했다. 이런 야든이에 대해 선생은 생전에 “그는 이웃들에게 늘 유쾌했던 선량한 국민이었지만 그의 죽음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보여주는 상징이다”라며 안타까워 했고 인간적인 애정을 표현했었다.
또 선생은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목에 건 손기정 선수보다 동메달에 그친 순천출신 남승룡 선수를 더 사랑할 만큼 결과보다 사람을 중시했다.

선생의 제자 이정연씨는 “선생님 자신은 ‘영리한 사람이 아니다. 건강하지도 않다’고 할 만큼 스스로 뛰어나다는 생각을 하시던 분이 아니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재능에 의지하기보다 끝없는 탐구와 노력으로 자신만의 철학을 정립한 분이 바로 고 정 종 선생이었다.
선생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영광에서 머물던 선생이 생판 모르는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와 음식을 사먹이고도 집안의 돈을 도둑맞은 일이다. 누구라도 분노할 만한 상황임에도 선생은 “돈을 잃은 것은 하나도 아깝지 않으나 그 아이들을 다시 못 볼 것이 안타깝다”고 할 만큼 선생은 아이들을 아끼고 사랑했다.
노환으로 몸이 편치 않았음에도 평생 약 한재 다려 먹는 법이 없었다. 등산을 즐겨하며 “등산탕을 먹으니 약은 따로 필요없다”던 고 정 종 선생이었다.
또 선생은 고향을 끔찍이 사랑하셨다. 5년전 시력을 거의 잃고 언어장애를 앓으면서도 대전 아들의 집에 제자 이정연씨가 도착하자마자 손수 싸놓은 짐 보따리를 내밀며 “내려가세”라고 말하던 고 정 종 선생.
비록 영광에서 생을 마치고 영광에 묻히고 싶었던 그의 소망은 이뤄지지 못했지만 그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제자와 영광군민들의 가슴에는 언제까지고 선생이 살아 숨 쉴 것이다.
배영선 기자 ygbys@yg21.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