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간양록과 굴비의 가르침
기고 - 간양록과 굴비의 가르침
  • 영광21
  • 승인 2016.08.19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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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포 포구를 바라보면 울적해진다. 개발이란 미명 아래 갯벌을 매입하기 전의 포구가 뇌리에 스치기 때문이다. 그나마 바닷물과 갯벌이 보이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폭염 속에서도 간혹 불어오는 해풍에 번지는 연한 비린내. 배불리 밥을 먹은 뒤에도 미각을 자극하며 침이 고이게 만드는 굴비 향을 맡으며 조용필이 부른 <간양록>을 읊조린다.

‘이국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서리고 / 어버이 한숨 쉬는 새벽달일세 / 마음은 바람 따라 고향으로 가는데 / 선영 뒷산의 잡초는 누가 뜯으리 / 어야어야어야 어야 어~~야 / 어야어야어야 어야어야 / 피눈물로 한 줄 한 줄 간양록을 적으니 / 님 그린 뜻 바다 되어 하늘에 달을 세라 / 어야어야어야 어야 어~~야’


신봉승 작가가 가사를 쓰고 조용필이 작곡한 이 노래는 우리 영광 출신 강 항 선생의 <간양록>에 실린 시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정유재란때 일본의 포로가 됐지만 워낙 출중해 일본 지도자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치며 제2의 왕인박사로 추앙 받던 강 항 선생의 고국에 대한 걱정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

간양록의 절개, 굴비의 굽히지 않는 모습 본받아
간양看羊은 글자 그대로 ‘양을 돌본다’는 뜻으로 중국 한나라 무제때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됐으나 흉노왕의 회유를 거부하고 양을 치는 노역을 하다 19년만에 돌아온 소무의 충절을 의미하는 말이다. 강 항이 세상을 떠난 뒤 제자들이 스승의 기록을 책으로 펴내면서 강 항을 소무에 견주어 <간양록>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적국에서 양을 치는 심정으로 세월을 기다리는 충신의 절개를 상징하는 <간양록>은 부를 때마다 새롭게 다가온다. 학창시절 <간양록>은 피눈물로 한 줄 한 줄 적어야 할 민주화된 세상을 위한 다짐의 노래였다면 지금은 현실의 벽 앞에서 우리 고향 영광의 앞날에 대한 기대와 우려의 비망록이다. 선영 뒷산의 잡초는 우리의 미래를 위해 넘어야 할 걸림돌이자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들린다.
예로부터 산과 바다, 들이 넉넉해 물산이 풍부한 내 고향 영광靈光. 호남 최대의 조창이었던 영광榮光을 되찾고 넉넉한 인심과 사랑을 회복해 후손들에게 살기 좋은 고향을 물려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지속가능한 미래 먹거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 시급한 것은 냉정한 현실적 판단과 준비다.

우리지역 현안 해결에 전약과 지혜 더해야
사용후핵연료 관리 문제는 지금의 우리에게 중요한 하나의 바로미터다.
영광이 원전과 함께 살아 온지도 어언 30년이다. 처음 원전이 들어선다고 했을때와 들어선 이후 누구보다 앞장서 반핵운동을 해 온 입장에서 내 청춘을 바친 지난 시절의 소회가 각별하다. 생각 같아서는 한빛원전 6기만이라도 다 들어내고 우리끼리 자급자족하며 살았으면 싶지만 이 세월 동안 우리는 사용후핵연료와 함께 살아오고 있다.
사용후핵연료를 비롯한 고준위방폐물 관리정책이 발표되자 우리 고향에는 반대 구호가 나부꼈다. 어르신들이 아침식사도 제대로 못 챙기고 공청회 현장으로 버스타고 상경해서 울부짖었다.
정부계획에 따르면 2053년 고준위 방폐장 가동전인 2024년부터 한빛원전의 사용후핵연료 저장고가 꽉 차기 때문에 한빛원전에 건식저장시설을 지어야 하는데 최종처분장이 확보되지 않을 경우 영원한 저장시설이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임시저장시설이 만들어지면 한빛원전이 수명을 다해 가동을 멈추더라도 고준위핵폐기물이 영원히 우리 지역에 남게 될 것이라는 걱정도 크다.
정부는 이런 우리 지역의 우려를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평생 원전지역이라는 부담을 안고 살아 온 지역 입장에서 당연한 모습이다. 한수원 역시 이번에 취소된 용역 추진처럼 지역과 상의 없이 일을 추진하려 해서는 그동안 쌓아 온 일말의 친화력마저 모조리 잃게 될 것임을 주지해야 한다.

현실을 깨닫는 대책 필요
지자체와 지방의회도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 영광지역을 비롯한 지자체협의회는 충분한 보상을 얘기하고 있다. 이렇게 엇갈리는 견해로는 결국 과거처럼 초기 목소리만 높았다가 각자 생업전선으로 돌아가면서 패배의 기억만 되새기게 될 수 있다.
생각으로야 세상도 뒤바꿀 수 있지만 생각만으로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 그래서 두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현실적 주장을 하자. 우선 국회의 대오각성을 촉구한다. 국회 산자위원장을 맡고 있는 국민의당 장병완 의원은 정부 계획에 반대한다면서 “향후 일정을 전면 중단하고 원전 소재 지역주민들과 충분한 사전 의견수렴을 해야 한다”라고 했다. 얼핏 들으면 반가운 얘기지만 내용을 아는 입장에서는 무책임한 전형적인 포퓰리즘이다.
앞으로 8년 뒤면 한빛원전 저장고는 포화된다. 여야 합의로 법개정을 통해 공론화의 근거를 마련하고 부족하기 짝이 없지만 사용후핵연료 공론화를 통해 우리나라 최초의 고준위방폐물 관리기본계획을 내놓기까지 7년 걸렸다.
부안사태 이후 참여정부에서 중·저준위와 고준위를 분리추진하기로 하고 연구와 정책적 절차를 밟아 온 시기부터 보면 12년이다. 그런데 어느 절차부터 어떻게 다시 하라는 얘긴가? 일정이 중단돼 포화되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한빛원전만 해도 우리나라 전기의 8.2%를 공급하고 있다. 포화되면 당장 우리 농·어업부터 치명타를 입는다. 무엇보다 그 시간만큼 한빛원전의 사용후핵연료는 더 원전 안에 있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인가?
둘째, 말이 아닌 행동을 보자. 중·저준위 방폐장 부지 선정 절차전 정부는 유치지역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마련했다. 중·저준위 부지에 고준위시설을 두지 않겠다는 18조도 특별법 내용이다. 지난 11일 정부가 고준위 방폐물 관리 절차에 관한 법을 입법예고했다. 앞으로 40일간의 입법예고 기간은 여론수렴 기간이다.
진정 지역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라면 중·저준위 특별법처럼 정부 절차법에 한빛원전에 건식저장시설을 설치하면 고준위 방폐장을 유치하지 않겠다는 단서조항이라도 붙여라.
지자체협의회는 적절한 보상을 운운하는데 시혜를 베푸는 보상이 아니라 전국민이 누리는 혜택의 부담을 지는 원전지역의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해서 지역발전의 토대를 만들어라. 그것이 입법기관 국회의 할 일이다.
영광의 대표 얼굴 굴비屈非는 한자 그대로 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고려 인종 때 반란을 일으키고 법성포로 유배 온 이자겸이 조기를 임금에게 진상하면서 혹시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오해할까봐 생선 이름을 ‘굴비’라고 적어 보낸 데서 유래한다. <간양록>이나 굴비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무조건 반대가 아니라 미래를 기약하며 전략과 지혜를 더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박찬석 / 법성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