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읍 신하리 동학군 무더기 화장해
영광읍 신하리 동학군 무더기 화장해
  • 영광21
  • 승인 2005.03.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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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지역 근현대사 조명 3 - 동학농민운동과 영광 ③
동학군이 이미 영광을 떠난 뒤 4월21일 오후에야 정읍(19일), 고창(20일)을 거쳐 초토사 홍계훈은 3대(隊)의 경군을 이끌고 증원군만을 믿고 영광에 머물고 있는 동학군을 치러 온다는 자가 멀찍이 떨어져서 겨우 동학군을 뒤따르는 꼴이 돼 좀처럼 선봉에 나서지 않고 지방군만을 앞세워가며 영광에 도착해서 진을 쳤다.

한편 홍 초토사는 고종의 윤음을 두 군관에게 휴대시켜 함평으로 이동한 동학군진으로 보내서 그들을 초무(招無)하려고 했으나 두 군관만 도리어 동학군에 붙들려서 돌아오지 못했다.

홍초토사는 또 4월22일 대관(隊官) 이학승 원세록 오건영 등에게 300명의 병력과 대포 2문을 주어서 장성방면에 진을 치고 있는 동학군을 기습공격하라는 출동명령을 해 이에 관군(경군)은 영광을 떠나 23일 오전에 장성 월평리 황룡촌에서 동학군 주력부대 4~5,000명의 군세와 맞부딪쳤다.

마침 동학군은 한 곳에 모여 식사 중이었는데 관군쪽에서 기습포격을 가했다가 오히려 치열한 반격을 받아 패배하고 말았다. 동학군의 반격 기세에 눌려서 대포 2문, 양총 100여정 등 많은 탄약과 무기를 빼앗기고 많은 관군과 대관 이학승만 전사시켰다.

나머지 관군은 동학군의 추격에 몰려 쫓기고 쫓겨 엎어지고 빠지며 영광으로 도망쳐 왔는데 그 꼴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에 초토사 홍계훈은 영광에서 패잔병을 수습했으나, 이들 관군은 당황하고 사기가 떨어져 진압의 책임을 진 초토사 자신부터도 크게 두려워하고 있었다.

무능하고 비겁하기 짝이 없으며 앉아서 공연히 병력의 증원만을 중앙에 호소 요청했던 홍계훈은 다시 영광에서 자기의 무력(無力)을 정부에 고백하고 외국군 차용안(外兵 借用案)을 건의하는 전보를 중앙에 보냈다.

이 전보를 보면 홍계훈은 아직 동학군과 한 차례의 접전도 가져보지 못했으나 ‘동쪽으로 쫓아가면 동학군이 서쪽으로 달아나서 그들을 다 죽여 없앨 도리가 없다’하고, 다시 ‘우리는 적고 그들은 많아서 우리가 군사를 나누어 몰아치기 어려우니 외국 군대의 힘을 빌리자’고 했다. 초토사의 전보치고는 참으로 졸렬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일본군 상대로 처절한 구국항쟁 벌여

홍계훈이 이렇게 겁낼 정도로 관군을 무찌른 동학군의 기세는 더욱 드높게 된 당시의 위세를 짐작할 수가 있다. 결국 홍계훈의 외병차용 건의안이 채택(세도재상 민영준이가 직접 주선한 청국 총리 원세개와 묵약)돼 1,500명의 청국군을 불러들였고(5월2일, 양력 6월5일) 이에 불청객의 일본이 개입하게 돼 청·일전쟁을 낳게 되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공공연히 이 나라의 주권을 침해하기 시작했다.

이 때에 왕실이나 양반 등의 지배계급은 물론이요, 이른바 근대적 정치인, 군인, 전국의 유림, 기타 국민의 대다수가 일제의 총칼 앞에 아부 굴복 아니면 은신 도피해 감히 항전하는 자가 없었으나 동학군만은 호남, 호서의 남·북접이 합동 궐기해 일본군을 상대로 처절한 구국항전을 벌였다. 이것이 항일 구국투쟁의 첫 장을 장식한 최초의 대대적인 항전이었고, 동학군의 2차 봉기(재기항전)였다.

당시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삼아 호남지방에서 일어난 동학군의 진용을 오지영이 지은 동학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갑오 9월 중순까지 동학군의 재기항전 사기(史記)에 의하면, 영광의 동학군 병력이 8천명에, 주도인물은 오하영과 오시영(이들 2명은 손화중(孫和中) 포(包)로 고창 두령까지 했었다)으로서 호남에서는 영광이 1만여명 병력으로 남원 다음가는 병력을 가진 동학농민군의 봉기지였다는 것이다.

동학군의 재기항전 때 영광의 주도인물(두령 : 장령격)인 오하영, 오시영 등 외 최시철, 오정운 등이 전봉준 대장 휘하의 장령급으로 활약했었다(동학사 204P 참조). 동학군의 2차 봉기때 영광에서 수백명의 동학군이 왜병과 싸우다 전사했는데, 그 시체를 찾아가지 못하게 왜병들이 지금의 영광읍 신하리(현 축협 하나로마트에서 200여m 부근)에다 무더기로 화장을 해 버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땅속을 파보면 불에 타버린 흰 뼈가 지금도 간혹 나오고 있다.

동학군의 애국사상 3·1운동으로 재현

갑오년 겨울에 이르러 영광 동학군의 두령 오시영을 잡아 관병에 인도하고 상여를 많이 받은 자가 있는데 이는 이현숙이란 자인데 영광 법성포 군진(軍陣) 소리(小吏)로서 갑오년 봄에 동학에 입신해 동학당 행세를 오히려 예전부터 하던 도인보다 더 동학당인 채 하던 배신자였다(동학사 280P 참조).

동학혁명은 그 목적을 다소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중앙에 진출해서 집권층의 구조를 개혁해 국가적인 대개혁을 단행하고 또 외세를 몰아내고 싶어하던 그 웅대한 구상의 실현은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동학군의 2차 봉기의 투철한 구국투쟁과 혁명정신 및 애국사상은 훨씬 뒤 3·1운동으로 재현되고 오늘날에도 이 민족의 정신속에 맥맥히 흘러 넘치고 있다.

◎ 전봉준(東徒代將)이 1894년 3월29일 고부에서 혁명의 기치를 들고 고부 군아를 점령하고 백산(白山)에 포진한 후 격문을 사방에 발송했을 때 이 고장 출신으로 그 깃발 아래 모여든 장령(將領 : 두령)급은 다음과 같다(성명만 자료에 있을 뿐 자세한 사항의 자료는 미수집 되었음). : 최시철 오정운 최재형

◎ 갑오년 9월 중순 재봉기하여 구국항일에 대열에 재기병해 선봉 지휘 궐기한 이 고장 출신 인사와 그 수는 다음과 같다. : 오하영과 오시영은 8,000여군을 거느리고 영광(집강소)에서 일어났다.

◎ 초토사의 보고에 의하면 정부군과 싸워 피해(효수, 임착포살)를 입은 이 고장 출신 인사는 다음과 같다(초토사 보고서의 기록에는 동학군으로 기록치 않고 도둑의 괴수 또는 두목으로 취급하여 기록된 자료를 그대를 옮겼음). ▶ 적괴(賊魁) : 송문수 오태숙 등은 효수를 당하였으며 최준숙 외 9명(성명 미상) 등은 임착포살을 당했다. ▶ 거괴(巨魁) : 양경수는 임착포살, 이현숙은 효수를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