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하듯이, 삼정의 문란은 이제 갓 태어난 아이에게 군포세를 물리는 황구첨정, 이미 세상을 떠나 백골만 앙상하게 남아 있을 이들에게 세금을 징수한 백골징포 등이었다.
제주도의 경우, 감귤은 일찍이 진상품으로 정해져 있었다. 한말 제주 관료들은 제주의 감귤 나무에 꽃이 필 무렵 꽃의 수를 세워 세금을 부과하였다고 한다.
과실나무의 꽃이 실제 열매로 맺는 것은 아니었음은 당연하다.
이에 제주도 사람들은 밤을 틈타 감귤나무에 뜨거운 물을 부어 자연사한 것처럼 꾸몄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학 농민군들은 죽창을 손에 들고 농민봉기를 단행하였다.
영광군수 민영수의 줄행랑
1894년 당시 영광군수는 민영수였다. 영광군수 민영수가 당시 영광 군민들에게 어떠한 횡포를 저질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의 횡포는 급기야 영광 읍민들의 봉기로 이어졌다.
1894년 2월28일 영광 군민들은 민영수의 횡포를 견디다 못해 김국현을 장두로 폐막을 바로잡기 위해 죽창을 들고 관아를 습격하였다. 그리고 군교를 죽이고, 영광군순 민영수를 위협하였다. 그러나 영광 읍민들은 군수 민영수의 목숨까지는 거두지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동학농민군들은 모내기 준비가 한창이던 5월 중순 무장에서 영광으로 들어왔다. 그때가 바로 1894년 5월16일이었다.
동학 농민군들이 무장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접한 영광군수 민영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영광군수 민영수는 몇 달전 영광읍민들에게 이미 혼줄을 당했었다. 그러므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줄행랑뿐이었다.
법성포 이속들 군기잡기
영광에 도착한 동학 농민군들은 4일 동안 영광에 주둔하였다. 그들은 영광 성 밖에 살고 있던 부자 조 정언(正言는 벼슬이름)과 김진사 집에서 식사를 해결하였다. 당시 동학 농민군들은 영광에서 훈련을 하는 한편, 인근 고을에 통문을 보내 동학 농민군에 동참할 것을 독려하였다.
이들은 법성포 이향(吏鄕)들에게 "민폐의 근본은 이포(吏逋 : 탐관오리들이 사사로이 조세를 축내는 것)에 있으며, 이포의 근본은 탑관으로 말미암고, 그것은 또 탐람이 근본이다. 이(吏)와 민은 다름이 없고 역시 민임에 틀림없음으로 공문부상의 이포는 모두 보고하라"는 통문을 보냈다.
당시 법성포 이속들의 횡포가 만만치 않은데 대한 동학 농민군들의 경고였다. 그리고 5월 18일 동학 농민군들은 법성포를 향해 진격했다. 법성포는 법성창이 존재했던 곳으로 세곡선은 물론 일본상인들의 내왕이 잦은 곳이었다.
동학 농민군들이 법성포를 포위하고 있을 때 마침 전운선 한양호가 세곡을 싣기 위해 법성포에 들어오자 농민군들은 죽창과 화승총을 들고 돌격하여 전운국원 김용덕과 일본인 항행사, 기관사 등 5명을 새끼줄로 포박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다음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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