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포함 전남 19개 시·군중 활동 출연금 1위
제주도 포함 전남 19개 시·군중 활동 출연금 1위
  • 영광21
  • 승인 2005.03.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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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조명 ⑥ - 국채보상운동, 3·1운동과 영광 ①
일본이 우리나라를 경제적 식민정책으로 구제한다는 미명하에 일본에 진 빚 1,300만원을 국민의 힘으로 갚아 국가의 독립을 지키자는 국채보상운동이 대구지역에서 첫 시작으로 일어난 것은 을사5적 암살계획 실패, 해아(海牙·헤이그) 밀사사건에서의 이 준 열사 순국이 일어난 구한말인 1907년이었다.

당시에도 언론기관인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문에서는 의연금 모금에 적극 나섰지만 내고장 영광에서도 조희경(曺喜璟) 정기인(鄭基仁) 정세철(鄭世喆) 등 26인이 발기인이 돼 국채보상소를 결성했다고 황성신문 1907년 4월19일자에 보도됐다.

당시 5월30일부터 9월19일까지 15회에 걸쳐 2,841명의 의연자가 1,428원90전(황성신문 게재)의 의연금이 걷혔다는 것은 그 당시 영광의 애국의식이 타지역보다 강한 지역임을 나타낸 것이다. 그것은 국채보상운동 의연활동과 걷힌 의연금 출연액이 제주지역을 포함한 전남 19개 시·군에서 영광이 당연 1위인 것에서 알 수 있다. 이 사실을 오늘의 세대들은 알고 있는지 의문이다.

그 당시 전국 각지에서 돈을 절약하기 위한 금연운동이 전개됐고 부녀자들은 금비녀와 가락지를 내놓아 이에 호응하였다. 이후 90년만인 지난 1997년 12월3일 치욕의 IMF경제신탁통치 지배를 받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그 때도 우리 국민들은 지난 역사가 그랬듯이 우리는 또 다시 IMF 극복정신의 지혜창출의 일환으로 전개한 '금모아 수출하자'는 캠페인과 근본취지는 한치도 다를 것이 없는 지난 역사를 우리는 되풀이한 셈이었다.

영광지역 3·1운동 서술에 앞서
을유년 올해가 100주년째 1905년 을사늑약(강제로 조약맺음 : 을사보호조약)에 의해 우리나라를 36년간의 식민지로 만들었던 일본이 또 다시 100년만에 ‘독도’를 일본영토라고 생떼를 부리고 있는가하면 36년간의 식민지역사를 왜곡 미화하고, 후세대가 배워야 할 역사교과서마저도 왜곡하고 있는 이때 또다시 86년전과 같이 제2의 3·1운동 정신으로 싸워야 할 분통이 터질 심정으로 영광의 3·1운동사를 집필하고자 한다.

3·1운동은 지금으로부터 86년전인 1919년 3월1일 14시를 기하여 온 겨레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한마음 한뜻으로 궐기한 독립운동이었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고 이듬해인 1919년 1월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려 패전국의 식민지 처리와 배상 등 전후문제를 논의하게 되었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이래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전개해 온 우리민족은 이 같은 국제정세의 변화를 주동적으로 포착해 전 세계에 우리의 독립의지를 선포하고 이를 펴 나기기로 했다. 이에 우리는 민족대표 33인의 선도로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거족적 시위를 전개했다. 3·1운동의 전개과정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우리동포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독립만세를 외쳤던 사실의 역사다.

특히 기독교 불교 천도교 등 각기 다른 종교가 저마다의 교리와 의식을 초월해 민족자주독립의 대명제하에 혼연히 손잡고 일어선 것은 우리 역사상 가장 감격적인 일로 새겨져야 할 것이다. 3·1운동의 불길은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등 해외로 번져나가 우리동포가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독립만세 시위가 벌어졌었다.

남녀노소·종교 극복 국외까지 영향
3·1운동에서 우리민족은 시종 비폭력적 평화시위를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총검에 의하여 7,509명의 동포가 살해되고 15,961명이 부상당하고, 47동의 교회당과 2동의 한국인 학교, 715채의 민가가 소실됐고, 이 같이 3·1운동에서 우리동포가 치른 희생은 막중했으나 반면에 우리가 거두어들인 성과 또한 지대했다.

첫째 3·1운동의 결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임시정부는 비록 중국 땅 상해에서 성립됐지만, 이는 단절 10년만의 민족주권을 계승하는 중요한 의의를 가진 역사적 사건이었다. 또한 임시정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로서 그 탄생은 우리 민족사의 새 기원을 여는 획기적인 기틀이었다. 그리하여 3·1운동은 그 뒤에 이어지는 모든 운동을 고무·격려하는 정신의 샘, 힘의 보루로써 작용하였던 것이다.

둘째 3·1운동에 의해 중국 동북 노령 연해주 등지에서의 독립군의 무장독립 투쟁이 한층 심화돼 청산리와 봉오동전투에서는 일본군을 대파하는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셋째 3·1운동으로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위상이 제고된 반면에 일제의 잔학성과 불법성이 백일하에 폭로됐다.
그 결과 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등지에서는 한국의 독립을 후원하는 여러 인사와 단체가 나타났으며, 각국의 여론도 점차 한국에 대한 동조 내지 지원으로 기울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카이로와 포츠담 선언에서 세계열강이 전후 한국독립을 굳게 약속한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다음호 계속>
※ 사진은 대한제국 말기에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의 하나인 국채보상운동의 구국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대구에 조성된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