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 버금간 영광의 3 · 1운동
이 만세운동은 각 면으로 확산돼 법성면을 위시하여 백수 군서 군남 홍농 대마 묘량면 등지에서 봉기가 계속됐다. 특히 3월28일 법성면에서는 신명희(申明熺) 박명서(朴明緖) 유영태(兪永泰) 송택규(宋澤圭) 배차순(裵次淳) 등이 주동이 돼 거사를 도모했으나 왜경에게 저지당하고 주동자 6명이 체포되어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유영태는 후일의 거사를 위해 모든 책임을 혼자서 짊어지고 남은 5인의 동지들을 석방케 했다.
그 후 유영태는 재판에 회부돼 유죄판결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도중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정신이상자가 되자 왜놈들은 유영태를 석방했으나 결국 회복하지 못한 채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당시 법성지서의 왜경들은 유영태를 가르켜 절도(竊盜)하다 잡혀 형무소에서 징역살다 미쳤다고 선전을 했었다. 이 사실은 주동자의 한 사람이었던 생존자 신명희에 의해 밝혀진 사실이다.
이상과 같이 영광의 3·1운동은 그 조직과 시위규모와 시위회수로 보더라도 거군적이었으며, 전남에 있어서 광주에 버금가는 운동규모였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한국독립운동사에 의하면 영광의 3·1운동은 3월14 ∼ 15일 그리고 3월부터 5월까지 10회에 걸쳐 연인원 8천2백여명이 만세시위에 참가해 사망 6명, 부상자 50명, 피검자 29명, 왜헌병출동 11회로 기록돼 있음을 볼 수 있다.
전라남도 도사(道史)에는 <영광의 독립운동>이란 표제로 기미년 3월27일에 조희태 소년을 선두로 독립만세시위를 하다가 왜경과 충돌하여 많은 부상자가 나와 최선을 다 하지 못하였으나, 이 당시의 지도인물로는 김은환 정인영 조용남(趙龍楠) 정진삼(鄭軫三) 조 운(曺 雲) 위계후(魏啓厚) 조희충(曺喜忠) 조융현(曺隆鉉) 유두엽 서순채 등이었고, 조희태 외 다수가 체포돼 옥고를 치루었으나 이들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아직 얻지 못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또한 1919년(己未 = 大正八年) 8월7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 형사 제1부 재판장(조선총독부 판사 : 나가노이찌로 : 長野一郞) 외 2명의 판사로 구성된 재판부의 판결문에는 보안법위반죄에 적용하여 김은환(金殷煥·30) 정인영(鄭仁瑛·30)을 징역 2년에, 조희방(曺喜芳·31) 박정순(朴正淳·31세) 조병현(曺炳鉉·27) 박병문(朴炳文·25)을 징역 1년6월에, 서순채(徐淳彩 =徐 隱·20) 김준헌(金浚獻·17) 유두엽(柳斗燁 = 柳 一·21)을 징역 1년에, 유봉기(柳奉基·19) 조병완(曺秉浣·17)을 징역 6월에, 조희태(曺喜兌·18)를 징역 4월에 처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첫 거사를 주도했던 조철현과 이병은은 징역 8월에 처했다.
이상과 같이 당시의 상황을 목격했던 생존자 조두현(曺斗鉉·현 94세), 조태현(曺泰鉉·현 90세) 옹의 증언을 종합하면 영광에 있어서 3·1운동을 전후해 청년층과 일반 지식층에 지도적 인물이 많았으나 그 중에서도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한 분은 해인 위계후와 고경진이었다 한다.
이 두 분께서는 교단에 서서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과 독립의 의지를 불어넣기 위해 평생을 몸 바쳐 일했으므로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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