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 신분으로 일본에 주자학 설파

그런데 난데없이 새해벽두 부터 주한 일본대사인 타카노 토시유키가 감히 대한민국의 서울 한복판에서 "다케시마(독도)는 일본 땅이다"고 지껄인 망발을 시작으로 급속히 번지고 있는 일본의 교과서 역사왜곡과 독도 영유권 주장 등 일련의 사건들은 일부 우익세력과 지자체(시마네 현)의 소행이라고는 볼 수 없는 아주 조직적이고 범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듯 하여 그 심각성이 매우 크다. 특히 "국가의 백년지대계는 교육에 있다"라는 말이 떠올라 소름이 돋는다.
끝없이 주변국을 침탈하며 전쟁을 일삼던 섬나라 일본, 손으로 하늘을 가리면서도 태연 자약하고 뻔뻔한 왜놈들속에서 우리 선조들, 그것도 이 지역 선비에 의해 눈과 귀를 뜨고 제대로 배운 양심있는 후예들은 자국의 행태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역사의 진실을 바로 잡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일본의 장래를 짊어질 청소년들에게 선배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감춘 새로 만든 역사를 교육시키겠다는 우익세력들의 음모를 잠재울 수 있겠는가.
한반도로부터 영향을 받아 기틀이 잡힌 일본, 차제에 세상을 칼로 지배하려던 무식한 섬사람들에게 공자와 맹자를 가르치고 포로의 신분으로 무사정권에 항거한 영광사람 수은 강 항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주자학자인 수은 강 항(1567 1618년)선생은 조선왕조 때 저명한 유학자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사숙재 희맹(私淑齋 希孟)의 5세손이며 연산조 무오사화(1498년)때 점필재 김종직을 숭상하였다 해 영광으로 유배, 진주강씨 영광시조가 되신 사평공 학손의 4세손이다. 선생은 7살 때 <맹자> 7권을 암송했고, 시를 뛰어나게 잘 지어 16살 때에 향사(鄕士)가 되고, 22살 때는 과거에서 진사에 급제했다. 29살 때는 박사가 되었으며, 조정의 공조와 형조에서 좌랑을 지냈다.
고향에 내려와 있던 선생은 선조 30년(1597년)에 풍신수길의 조선침략 전쟁(정유재란)이 나자 이광정의 종사관으로 부임해 의병을 모으기 위해 격문을 들고 동분서주하던 중, 영광이 이미 적의 손에 들어갔다는 소문을 듣고 의병과 함께 배를 타고 이순신 장군이 있는 통제영으로 향하다 왜병 토우도우 타카도라(1556 1630년) 군사들의 포로로 잡혀 일본 시코쿠 땅의 오오츠로 끌려갔다.
이때부터 일본의 포로생활이 시작되었고 1년쯤 되었을 때 탈주를 시도하기도 하였으며 우와지마섬 성문에다 붓글씨로 '수길의 조선 침입은 천인(天人)이 함께 용서치 못할 폭거이므로 어김없이 천지(天地)의 노여움을 살 것이로다'라는 격문을 써 붙였다가 붙잡혀 참수당할 위기에까지 처했으나 일본 학승(學僧)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져 다시 오오츠 땅으로 호송된다.
그곳에서 강 항 선생은 쿄우토 사람인 후지와라 세이카(1561 1619년)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일부 박사가의 독점물에 불과하던 종래의 유학을 개방화시켜 대중화한 에도유학의 창시자 후지와라 세이카는 본래 쇼우코쿠지 사찰의 중이었으나 환속해 명나라로 건너가 유학, 주자학을 공부하려고 시도했던 사람이다.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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