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역사도발에 되돌아 본 강 항 선생 ②
그 와중에 토우도우 번주에 조선 포로인 유학자 강 항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지와라 세이카는 강 항을 찾아가서 학문을 가르쳐 달라고 엎드렸다.그 당시 한슈우 타쓰노의 번주인 아카마쓰 히로미찌는 37세였고, 후지와라 세이카는 38세 강 항이 32세였다. 손위의 나이에다 신분이 드높은 번주인 다이묘우(大名. 영주의 칭호)며 학자가 조선인 포로, 더구나 나이 어린 강 항에게 '배운다'고 하는 것은 보통 같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포로의 몸으로 온갖 굴욕과 고초를 겪으면서도 일본인인 그들이 열성을 다해 주자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소망이며 학문에 대한 진지한 열정과 집념을 알게 되자, 드디어 마음을 열고 은수를 초월해 주자학의 의미며 자구를 풀어가면서 사서(대학 중용 논어 맹자), 오경(역경 시경 서경 춘추 예기)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1599년 2월15일에 일본의 사서오경의 훈독의 기본이 되는 <사서오경 왜훈(四書五經 倭訓)>이 완성된다.
임진왜란 이후 토쿠가와 막부가 문치를 표방하면서 그 정신적 지도이념을 주자학에서 구했고 그 과정에 강 항 선생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는 것은 또 하나의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후지와라 세이카는 이 책을 기본으로 주자학을 널리 설파하였고 "일본, 종유(宗儒)의 의(義)를 외치려는 자여, 이 책을 가지고 원본을 삼으라"고 자신만만하게 쓸 만큼 감동했다고 한다.
강 항 선생은 저서 <간양록>을 통해 2년8개월 동안 일본에서의 포로생활은 물론 일본의 여지, 관호, 군세, 형세 등을 기록해 선조에게 소(疏)를 올린 <적중봉소>가 담겨 있고, <적중문견록> 즉 왜국백관도, 왜국팔도육십육주, 임진·정유에 침략해 온 왜장의 수요 등을 기록해 조정에 보고한 내용들이 들어 있다.
비록 포로의 신분이었지만 굴하지 않고 배우려는 자의 눈과 귀를 뜨게 해주고, 일본의 정세를 담은 중요한 정보자료를 조정에 보내줌으로서 민족적 자부심과 문명의식을 확고히 갖고 있었던 인물이다.
백제의 왕인 박사가 일본 땅에 건너가 왜나라 왕실에서 왜나라 왕자들에게 글자와 글을 가르쳐 주면서 추앙받게 된 발자취를 역사학적으로 밝힌 일본 역사학계의 태두 우에다 마사아키 박사의 고뇌와 '제2의 왕인 선생'으로 일컬어지는 수은 강 항 선생의 눈부신 발자취를 탐구해 자랑스럽게 발표한 일본 쿄우토교육대학 강사이며 사학자인 야마자키 야스마사 등 일본의 양심세력들을 부끄럽게 만들어 버린 역사왜곡은 일본사람 모두의 무식함을 굳이 감추려 하는 추태요, 한반도로부터 영향을 받아 문화의 눈을 뜬 미개했던 섬사람들의 열등감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주변국들의 규탄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의 장래를 짊어질 후학들에게 자국에 유리한 왜곡된 역사를 차근차근 가르치려는 의도는 분명 피가 끓고 통분할 일이지만 자매결연지의 지명을 따 만든 센다이로를 빛고을로로 도로명칭을 바꾸고, 어느 사회단체의 시위 구호처럼 사쿠라는 일본 국화니까 모두 잘라 버린다고 해서 왜놈들의 버르장머리가 고쳐지겠는가.
서울에서 일본을 규탄한다는 시위 군중들이 일본 제품인 MP3를 귀에 꽂고, 취재하기 위한 기자들의 손에는 하나 같이 니콘카메라가 들려있더라는 일본의 대표적 우익세력인 산케이나 요미우리신문의 비아냥 섞인 기사가 왜 이렇게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지 모를 일이다.
강춘권<법성포민속연보존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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