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들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인생이지”
“자식들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인생이지”
  • 영광21
  • 승인 2018.04.20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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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수 어르신<묘량면 덕흥리>

“내가 13살 때 우리나라가 일본에 해방됐어. 그때는 쌀밥은커녕 보리밥도 못 먹고 감자랑 고구마 밥을 먹고 살았지. 정말 말도 못하게 힘든 시절이었지만 꿋꿋이 버텨왔다네.”
박성수(85) 어르신의 말이다.
3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난 박 어르신은 7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큰 형수와 작은 형수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14살 무렵 박 어르신은 집을 떠나 목포로 향했다. 1년 반 동안 남의 집 살이를 하며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열심히 일해 온 그에게 돌아오는 댓가는 넉넉지 않았다.
그렇게 또다시 박 어르신은 목포를 떠나 서울로 상경했다. 그 당시 서울 시내는 6·25전쟁으로 폭격을 맞아 공터가 많았다.
마땅히 지낼 곳이 없었던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시장으로 향했다. 천막을 구입해공터로 향했다. 한쪽 구석에 시장에서 사온 천막을 치고 생활했다. 주머니를 털어 겨우 산 밥솥 하나가 전부였다. 박 어르신은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가난에 찌들어 살던 시절이라 지금처럼 물건을 살 때 봉지에 담아주지 않았어. 비닐이 귀했기 때문에 뭐든 종이봉투에 담아줬지. 그걸 보고 아이디어를 떠올렸어.”
박 어르신은 시멘트 공사장에서 다 쓰고 버린 시멘트 포대를 가져와 깨끗이 씻어서 자르고 풀칠을 했다. 탄탄한 봉투를 만들었다. 양껏 모은 봉투를 들고 시장에 나가 상인들에게 팔기 시작했다. 봉지가 귀했던 시절, 그의 아이디어 상품은 불티나게 팔렸다.
그렇게 한푼 두푼 모아온 돈을 들고 어르신은 21살에 다시 고향 영광으로 돌아왔다.
“먹고 살만큼 돈을 어느 정도 모으니 결혼할 나이도 됐고 고향이 생각나 영광으로 내려왔네”라는 박 어르신은 중매로 영광읍 신월리에 사는 2살 터울의 어여쁜 아내를 만났다.
서울에서 봉투를 팔며 모은 돈으로 가족들 도움 없이 결혼생활을 꾸려나갔다는 박 어르신은 “가진 게 없으니 소박하게 살림을 시작했어. 영광에서는 뭘 먹고 살까 고민하다가 일본에서 탈곡기를 돌리는 발동기를 들여와 기술을 배웠어”라고 말한다.
모두가 심한 가뭄에 몸서리치던 1967년. 그는 발동기로 작업해둔 곡물 덕분에 어려움 없이 돈을 벌며 가정을 늘려왔다.
아들 둘, 딸 셋을 키우며 힘든 나날들을 자식들만 생각하며 이겨냈다는 박 어르신.
박 어르신은 “내 인생은 자식들 없이 혼자였다면 버티지 못했을 인생이었다”라고 말한다.
살림이 윤택해지니 그는 1988년부터 4~5년간 마을 이장을 하며 마을일을 돌봤다.
박 어르신은 “한가지 슬픈 점은 아내가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 외롭고 보고 싶을 때가 많아”라며 “그래도 고생해 온 젊은 날 다 가고 이젠 게이트볼도 하고 놀며 편히 살 수 있어 행복해”라고 말한다. 
변은진 기자 ej5360@yg21.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