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이 낳은 고려의 통일을 완성한 유학자
영광이 낳은 고려의 통일을 완성한 유학자
  • 영광21
  • 승인 2018.11.01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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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융합한 포용적 사상가 김심언

올해는 영광을 빛낸 고려시대 유학자 문안공 김심언이 서거한지 1,000년이 되는 해이다. 문안공 김심언은 영광읍 월평리 기천마을에서 태어나 고려 최초의 과거 급제자인 최섬을 좇아 수학해 고려 성종대에 관직에 올랐고 1,015년에는 서경유수를 지냈다.
6정6사와 자사6조로 대표되는 그의 청렴사상은 고려 성종 때 본격화되는 한국유학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광문화원은 10월26일 문안공 김심언의 학술토론회를 개최했다. 화합과 통일의 시대를 맞이한 오늘날 한국학대학원 허흥식 명예교수는 고려의 사상과 통일에서 김심언의 역할을 되짚어보았다.              

/ 편집자 주

 

역사란 민족과 국가의 거시적 경험과 개인과 사회공동체의 미시적 경험을 종합해 시대별 특성과 현재의 필요성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우리에게 통일은 제국주의에 이어 외세가 개입한 분단으로 말미암아 70여년간 달성하기 어려웠던 소원이다.
어느 시기에도 만족한 통일은 어려웠지만 의미가 가장 큰 통일은 고려초기에 한번 성취했다.
군사력에 의한 영토의 확장은 역사상 자주 있었지만 국가 사이의 합의와 협력에 의한 통일은 군사력을 사용한 물리적 통합에 비해 극히 드물었다,
통일이란 분열된 다수의 국가를 하나의 민족이란 상위 개념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이다.
가장 멋진 통일은 고려에서 1세기간 소요해 완성됐다. 삼국의 부활을 선언한 후삼국의 건국부터 계산하면 고려태조 왕건의 통합은 궁예를 거쳐 40여년이 소요됐지만 지역간 지배충의 배출에서 통일은 완성한 시기는 고려태조가 즉위한 다음 1세기를 합쳐 김심언이 별세한 시기와 상관성이 크다.
올해는 영광출신 학자이며 정치가인 김심언이 별세한 1,0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올해도 여러 가지 통일 조짐이 나타났지만 1,100년전부터 1,000년전까지 100여년간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 1세기였다.
고려는 세계어로 한반도란 지역과 국호로 고려의 건국 1,100년의 의미를 더한다.
고려 건국 1,000주년은 1년 늦게 3·1독립운동으로 아쉬움을 달랬고 올해는 3·1독립운동 100년과 아울러 고려건국 1,100주년과 김심언의 서거 1,000주기를 맞아 그 의미를 제대로 돌아보고자 한다.

고려통일의 완성과 걸림돌
고려의 통일과정에 전쟁이 많았다. 특히 고려 태조가 재위한 23년 중반에 이르는 18년간 치열한 공방의 시기였다. 이보다 앞서 궁예가 개국하기까지 양길의 부하로서 적어도 5년간은 재위한 18년간 공방에 못지않게 치열한 시기였다. 태조 왕건이 즉위해 외형적 통일을 완성한 18년간과 별세하기까지 5년간을 합치면 46년간이다.
왕건은 재위 말년까지 외형적 통일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지만 이후 내부의 토호와 결혼정책으로 말미암아 왕족간의 갈등과 공신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적 갈등이 심했다.
광종은 과감한 인재등용으로 과거제도를 실시했다. 인재등용과 경제에서 지역적 편차를 줄이고 경제기반의 편차도 줄였다. 그러나 이후 경종과 성종은 신라계의 인재를 우대하고 멀리 경주에 행차하며 지역적 편중으로 복귀하고 불교를 탄압하는 정책을 폈다.
성종 말년과 현종 초기 거란침입에 위기를 두차례 겪으면서 지방제도의 편제를 4도호부와 도제의 강화로 대처했다. 김심언의 봉사2조는 이에 대한 적절한 대처였다.
그는 통진대사 양경의 비문을 쓸 정도로 불교사상에도 깊은 이해를 보인 유교에 편중된 사상가도 아니고 민심을 통합하는 다양한 사상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함양하고 대응하는 유연한 지식인의 자세를 견지했다.

김심언 찬서 통진대사 양경의 비편
김심언이 지었다는 통진대사 비문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름만 전한다.
김생의 글씨로 유명한 낭공대사 행적의 수제자였고 그의 비는 백월서운랍비와 가까운 태자사에 있었다고 한다.
고려 초기 금석문은 사서의 기록이 부족한 시기이므로 가치가 크다.
태조 왕건과 성종시대는 고려사 기록이 적지 않지만 그 사이인 혜종부터 경종까지는 기록이 극히 적으므로 유적이나 비편도 아주 중요하다.
특히 광종의 재위기간은 그야말로 개혁정치의 소용돌이였다. 중요한 시대는 기록이 많고 후대의 연구도 많지만 광종시대 기록은 이상하리만큼 적다.
낭공대사 행적은 신라말기에 살았지만 왕건이 즉위하기 전 해에 입적했고 그때에 지은 비문이 광종 초기 건립됐다. 이 비를 세운 과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 행적의 수제자였던 통진대사 양경이었다.
양경은 신라말기 태어나 광종시대 노년기를 보냈고 비편의 전반 일부만 남아 확실하지 않지만 광종치세 중반기에 입적했으리라 짐작된다.
이 비를 짓고 쓴 인물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밝힌 좌간의대부 김심언이 확실하다.
그는 문헌적으로 한림학사였고 구양순체에 능했고 서예가로도 현존하는 유일한 사례를 실물로 남긴 인물로 기록됐다.
양경은 국사나 왕사는 아니지만 광종시대에 옛 신라지역의 민심을 무마시키는 태자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비문은 일부이고 단절이 심하지만 양경의 생애 중반부에 해당하는 태조의 말년까지 내용을 연보처럼 순서대로 실었다.
세속의 인연과 출가 그리고 스승인 행적과의 관계, 유학과 귀국, 태조의 말년 왕명으로 청량사의 주지를 맡았던 경력까지 정리된다.

통일의 완성에서 김심언의 역할
고려는 후삼국을 전반에는 군사력으로 이후에는 귀순과 대의를 중요시해 통일했지만 지역적 지배층의 편차가 고르지 못한 모순을 극복하지 못했다.
특히 경종과 선종은 친신라계의 인사에 편중해 광종의 정책에 역행했다. 이 시기에 거란의 침입을 받은 고려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편제를 시도했다.
고려의 통일은 전국을 3경 4도호부로 삼는 새로운 편제이고 이후 8목으로 행정편제를 보충해 국가가 융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시기에 사거했다.
성종 초기 시무책을 올렸던 최승로는 성종시대의 정치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김심언은 최승로의 뒤를 이어 이후의 정치방향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지방제도의 정비를 통해 국가의 통치제도를 확립한 유학자로 최승로가 중앙의 통치방향을 유교사상에 의해 확립하는 과정에 기여했다면 김심언은 지방제도를 확립해 중앙과 지방을 소통시키고자 했고 최승로의 정책을 더욱 보완한 정치사상가로 평가받는다.
성종시대 말기와 현종대에 이르기까지 거란과의 대결에서 고려는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다. 이에 대한 대처는 국가의 미래에 큰 영향을 주었다.
최승로의 시무책은 태조의 훈요와 광종시대의 개혁정치와 상통하는 요소도 있지만 불교의 보호가 탄압에 가까운 사상으로 바뀌었다는 차이가 있었다.
김심언의 봉사2조는 유학을 강조하고 불교를 탄압한 최승로의 사상에 비추어 볼 때 전국의 국력을 동원해 거란에 대응하기 위한 지방제도의 확립이라는 측면에서 시대적 과제와 연결됐다고 해석하고자 한다.
성종말기 거란의 침입을 받자 최승로의 시무책에 따라 폐지했던 불교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제전인 팔관회와 연등회를 부활하고 대부분의 백성이 신도인 불교를 보호한 정책으로 복귀했다.

김심언 다양한 사상을 포용하다
김심언은 통진대사 양경의 비문을 쓰고 현종의 정치에 협력하면서 태조와 광종이 지향했던 방향으로 복귀에 기여했다는 측면에서 최승로와 차이를 보인다.
최승로는 경종에 이어 성종시대에 신라계 귀족의 관인을 대거 등용하고 경주를 방문한 신라계의 우대정책과 맞물려 있었다.
현종시대는 앞선 경종과 성종시대와는 달리 광종시대의 지역별 차등을 줄이는 정책으로 전환하고 거란의 침입을 받자 경주가 아닌 나주로 몽진해 이후 지역판도에 커다란 전환을 주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김심언은 후백제계 지역의 출신이면서 3경의 하나인 동경과 수도인 개경의 중간에 위치한 태자사에 세운 통진대사의 비문을 지음으로써 유학과 경주를 중요하게 생각한 사상과 지역편중 정책을 극복하고 불교를 중심으로 사상의 다양성과 지역의 균등성을 배려한 정책의 전환에 기여했다.
고려 태조가 훈요로 정치적 통일에 이어 포용적 사상의 방향을 제시한 이래 광종의 개혁정치와 불교를 포함한 고려 초기 사상과 방향에 김심언은 충실하게 기여했다.
이후 고려가 나아나는 방향은 최승로에 의해 유학을 내세우고 불교를 탄안했던 사상과는 달리 김심언은 시대정신에 부합한 사상가로 고려의 발전과 순기능에 기여했다고 재평가해야 한다.

신라의 통일 고려의 통일
우리는 분단된 상황에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자주 부르며 통일이란 말을 쉽게 사용한다.
통일은 흡수통일과 평화통일로 구분된다. 흡수통일이 무력을 이용해 다른 국가를 지배하는 행위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정복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통일이 아니다. 군사력을 최대한 줄이고 상대방 국가에 대한 요구와 처우를 최대한 배려한 통일을 평화통일이라고 한다.
어느 통일이든 무력보다 국력이 월등하게 향상돼 상대국을 배려한 동의가 필요하다.
신라는 3배에 가까운 당나라 군사들을 끌여들여 백제를 멸하고 6배를 끌여 들여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이를 신라의 통일이나 통일신라라고 부른다.
당이 차지한 고구려의 남은 성에서 고구려가 망한 다음 20년이 지나 걸걸중상과 대조영이 진국을 세웠고 대외로 고구려의 계승을 표망했다.
백제와 고구려의 후예로 이름을 온전하게 남긴 사례는 신라보다 당에서 월등하게 많다. 우리의 성씨에서 고구려와 백제왕족의 후예라는 뿌리는 내세운 성씨는 없다. 오히려 일본의 왕실을 백제의 후예임을 남겼다.
태조 왕건은 신라 왕실의 후예는 물론 후백제 왕실의 견씨와 광주이씨를 그대로 우대했고 오늘날에도 유지됐다. 고려는 신라왕실과 후백제왕실도 유지해 보호하면서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수많은 외국인들의 귀화도 받아들이고 여진과 발해의 성씨도 고려에 흡수해 보호했다.
고려는 신라와 후백제의 왕족과 기술자를 우대해 문화와 기술을 계승했다.
광종시대는 과거제도를 실시해 전국의 인재를 지배층으로 흡수했다.

김심언 통일을 완성하다
성종 대 김심언은 최승로의 뒤를 이어 지방의 통치에 힘을 기울이면서 3경 4도호부 8목으로 표방되는 지방제도의 기초를 마련하고 과거제도에서 지방의 인재를 인구비율로 선발하는 기초를 마련했다.
김심언은 봉사2조에서 최승로의 뒤를 이어 지방관의 덕목에 대해 논했으므로 최승로의 사상과 비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세이다.
다만 최승로는 고승의 비문을 쓴 일이 없다. 최승로보다 앞서 신라말기 최치원이나 쌍기의 뒤를 이어 여러차례 과거의 지공거를 담당한 왕융도 현각선사비문을 지었음이 확인된다.
고려말 유학자인 이색이나 심지어 척불의 대명사인 정도전도 불교관계의 금석문도를 남겼고 유학자로 알려진 최충과 권근도 불교금석문을 남겼다.
최승로는 유학에 치우친 시무28조를 올렸고 성종시대 불교를 탄압하고 경주출신의 인재등용에 편중돼 국왕을 경주에 방문하게 했다.
그는 앞선 경종시대 진관선사 석초의 비문을 쓰라는 왕명을 극구 사양했고 왕융이 이를 담당했다.
김심언은 봉사2조를 올렸다. 최승로가 국왕을 중심으로 불교를 억제하는 사상이었다면 김심언은 지방의 통치기반을 청렴하고도 균등하게 발전시켜 국력을 향상시킨 정책을 제안했다. 김심언은 낭공대사 행적의 제자인 통진대사 양경의 비문을 짓고 쓰기까지 했다.
이를 통해 보면 김심언은 최승로와는 달리 고승비를 지으라는 왕명을 사양하지 않았고 불교를 옹호하려는 의지가 있었음이 확실하다.
김심언은 불교가 기반인 시대정신을 배려해 정치에서 유교의 실용성과 불교의 포용성을 활용해 태조의 다양한 사상을 융합하는 정책을 펼쳤고 광종의 개혁정책을 강화했다.
그는 고려 통일을 완성했던 정치가이면서 동시에 백성 대부분이 신봉하는 불교를 옹호한 포용적 사상가로 새롭게 조명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허흥식 명예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