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현 선생의 민족혼 드러낸 항소취지문

(남궁 선생의 항소취지문)이는 그들의 선제(先帝)인 명치천황의 성지(聖志)를 배반하는 것이다.
그들의 선제는 거액의 전쟁비용과 인명을 희생해 아라사와 청국과의 전쟁을 일으키고 승리한 것은 오로지 조선을 보호하고 나아가서는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함이요, 조선의 문란한 정치를 수습하고 반상의 계급 때문에 고통받는 백성을 위하여 합방 후를 보장하겠다고 맹약했거늘
현금에 이르러 우리 조선의 수족을 완전히 구속해 제선(諸船) 악법을 제정하고 백성이 견딜 수 없는 학대와 구시대의 계급사회때보다 수십배 더 극심하던 차에 구파전쟁(驅巴戰爭)이 끝나고 불란서 파리에서 열린 만국평화회담에서 한국의 대표가 민족자결주의임을 세계만방에 선포하고 우리 민족이 자주민임을 천명한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천리(天理)에 어긋남이 추호도 없는 것이다.
이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는 애국적인 수만명의 동포들을 그들은 총검으로써 살상하거나 투옥해 고문하니 치안을 어지럽힌 죄인은 바로 그들이지 우리가 아니라 천인이 공노할 죄악의 작폐(作弊)는 그들이 영원히 우리 조선의 주권과 삼천리강산을 무력으로써 강식하려는 흉계를 반증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들의 나라는 본래 미개국으로 작금 5천년 동안에 성야의 문명을 수입해 무력의 우세를 자랑하는데 불과하나 우리 조선은 단국 개국이래 5천년의 문화를 자랑하는 문화민족이라.
고구려나 신라, 백제때에 한창 우리 문화와 무력이 우세했을 때에도 결코 그들의 나라에 한점 누를 끼친 일이 없을 뿐더러 백제때에는 왕인 박사를 보내어 학문과 예법을 가르치고 많은 공인(工人)과 예술가를 파견해 그들의 문명과 문화를 꽃피우게 했던 은인이기도 하다.
나라의 역사를 보아도 그들은 불과 2천년에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갑자기 무력으로써 우리 민족을 강압해 대화혼(大和魂)이 화합하라 하니 5천년 전통을 면면히 뻗어온 조선혼이 일시에 그들 대화혼에 동화될 수 있다고 보는가.
이는 그들의 총검에 피를 흘리며 목숨을 바쳐가며 또 인도(人道)를 저버린 모진 고문을 견디면서도 전국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신분의 상하를 막론하고 심지어 어린 소년에 이르기까지 태극기를 흔들며 선봉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쳐대는 것을 보아도 그들이 강요하는 데로 조선혼이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을 명확히 증명하는 일이 아닌가.
조선은 역사적으로 형제의 우의로써 지내온 나라이다. 이번의 독립선언시위는 결코 배일주의가 아니라 우리의 주권을 되찾고 우리나라가 독립국임과 우리민족이 자주민임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것이며 이는 우리의 당당한 권리이며 누구도 이를 침해할 수 없는 천리인 것이다.
그들은 이 떳떳한 우리의 권리를 인정해야 하며 그래야 동양의 평화가 유지될 것이다. 20세기의 장래를 국가적 침략과 경쟁을 지양하고 인종적 대결이 있을 것에 대비해 황색인종은 모두 형제의 우의를 굳게 해야 될 것인즉 어찌 우리조선의 독립운동이 배일주의로만 몰아 볼일 수 있을 것인가.
빼앗기는 조국과 짓밟히는 민족을 구하려는 피맺힌 투쟁이 어찌해 죄가 되는가. 이는 법이기 전에 양심과 윤리와 인도의 문제이다. 우리 속담에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거리고 쥐도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고양이에게 덤빈다는 말이 있다. 금반 독립운동에 연루돼 체포 구금된 모든 애국동포들을 무죄로 석방해 줄 것을 이심법원에 항소하는 바이다.
(3) 전북 임실에서의 양태환
양태환(梁太煥) 선생은 경남 하동 사람으로 당시에는 법성면 언목리 소재의 은선암 주지승)으로 있었다. 나이 35세인 양 대사(梁大師)는 1919년 3월중에 고종황제의 인산의식(因山儀式)에 참례하기 위해 상경, 뜻밖에도 그곳에서 민족의 열화와 같은 대함성(大喊聲)을 보고 들었다. 귀로에는 전북 임실 사람들과 길동무가 되었다.
원래 승려란 등에 바랑을 지고 손에 목탁만 들면 가는 곳이 따로 있지 않았고 오로지 '우리'라는 민족적 유대가 있을 뿐이었다. 도보로 내려오다 보니 자연히 화제는 만세시위 쪽으로 쏠리게 되고 쉽게 의기가 투합돼 졌다. 양 대사는 임실 사람들의 권유에 따라 그쪽으로 내려갔다.
거사일은 3월23일 장소는 임실군 둔남면 계수장(契樹場) 터로 정하고 준비에 임했다. 장터에 모여든 수천 군중들은 약속된 시간과 장소로 운집했다. 주동자 24명은 미리 만들어온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눠줬다. 총지휘자는 이기송(李起松) 선생이었고 양 대사는 선동연설을 담당했다.
웅변술이 뛰어난 양 대사는 수많은 군중을 향해 외쳤다. 파리만국평화회담 등 일련의 국제정세를 곁들여 우리 2천만동포는 이때 조국의 독립이라는 고동의 목적을 위해서는 일치단결해야 하며 그 역량을 과시하기 위해서는 만세를 결사적으로 불러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양 대사의 이러한 사자후에 흥분한 수천군중은 노도처럼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에 쇄도했다. 일단은 일인상가에도 밀어붙였고 가옥과 상품을 닥치는 대로 파괴했다.
이로 인해 양태환 선생은 현장에서 체포당했다. 그는 7월31일 초심에서 5년 징역을 언도 받았다. 10월2일 이심에서도 감량은 없었고 10월30일 상고법원에서도 기각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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