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3·1운동과 독립선언의 주역들 ①
영광의 3·1운동과 독립선언의 주역들 ①
  • 영광21
  • 승인 2019.02.22 15: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남도 만세운동에 불을 붙이다
영광군, 전남 군단위 최초 3·1운동 전개

영광군이 지난 14일 전남농업기술원과 합동으로 관심 농가와 관계자를 대상으로 보급형 스마트팜 개발모델 보급사업 설명회를 진행했다.
보급형 스마트팜은 전남도 농기원이 자체 개발한 것으로 기존 스마트팜 시설비용의 65% 수준으로 설치비를 낮춰 농가 규모와 작목에 맞도록 한 3가지 유형의 모델이다.
단순형(1형)은 엽채류, 수박, 시설감자다. 복합형(2형)은 3~6개월 단기간 재배하는 딸기, 멜론, 오이이며 연동복합형(3형)은 연중 재배하는 토마토, 파프리카 등에 적합하다.
특히 보급형 스마트팜 모델은 농가가 직접 제어판넬과 보드를 쉽고 간단하게 설치·교체할 수 있다.
보급형 스마트팜 단지화 시범사업은 2022년까지 4년간 진행되며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설치·운영된다.
농업기술센터 관계자는 “관내 농가에 보급형 스마트팜 모델을 확대해 농가 노동력 절감과 품질 향상에 앞서 나가겠다”고 말했다.

 

영광은 전남에서 최초로 광주를 이어 두번째이자 군단위에서는 처음으로 14일에 3·1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한 조철현·류 일 등이 독립선언서를 갖고 고향에 돌아와 영광보통학교 교사 이병영(1894~1954) 등의 독립지사들과 내담해 이뤄졌다. 당시 조철현은 24세로 “나는 대정 8년(1919) 3월3일 이태왕 전하의 장의식에 참여하기 위해 경성에 갔다가 동월 12일 귀향한 이래 독립만세 고창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이를 통해 그는 3·1운동 이전부터 독립의식에 투철했던 인물로서 독립선언서를 영광에 가져온 것은 3월12일이었고 곧바로 영광의 지사들과 협의해 14일에 전개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정리돼 있는 일제의 신문·진술서와 판결문을 통해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원심의 증거에 의하면 피고는 영광보통학교 생도를 선동해 조선의 독립운동을 하고자 결의해 동교 생도 정헌모를 교실에 불러 각지에서 행해지고 있는 조선 독립운동에 관해 감상을 물어봤고 ‘조선인은 지금 행동을 결박당하고 있으니 과감히 그러한 결속을 면하려면 너희들이 한시 바삐 조선의 독립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해 독립운동의 개시를 결의하게 했으며 동교생 허 봉에 대해도 목하 각지의 모의에 관해 조선의 독립을 위한 준비가 있느냐고 질문해 암암리에 도발토록 했다. 이와 같이 정헌모·허 봉은 피고의 선동과 교사에 따라 조선독립운동을 결행키로 협의해 동교 생도 약 150명과 같이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해 치안을 방해한 사실을 인정한다.

피고 정헌모는 이병영의 선동 교사에 의해 동월 13일 영광면 백학리에 있는 피고 조철현의 집에서 자기와 허 봉 등 9명에 대해 상기와 같은 의도를 고하고 피고 허 봉·조술현 등 수명은 당시 찬동해 다음 14일 그 운동을 실행키로 협의했다.
피고 이병영은 “나는 영광보통학교에 봉직 중 금년 3월10일 3년생 급장 정헌모를 교실로 불러 동인의 의향을 들었더니 동인은 소요를 위해 적극 준비 중이라고 하기에 무슨 이유냐고 물었더니 동인은 ‘우리들 조선인은 대단히 속박을 당하고 있으니 거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독립을 찾는 것’이라고 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처럼 영광에서는 일찍부터 독립의식을 자각하고 있었던 교사 이병영과 학생 정헌모(3학년)·허 봉(2학년)·조술현(1학년) 등이 10일 이전에 독자적인 거사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들은 서울에서 내려온 조철현 등과 3·1운동을 협의 계획하게 됐는데 당시 교사 박태엽과 영광광흥학교 졸업생인 정인영을 비롯해 고종의 국장에 참여하고 내려와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이좌근·조병현·조맹환·노 준 등도 주요 인물이었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14일 정오부터 시작된 영광의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이날 영광읍 시장에서 류 일이 선언문을 낭독하고 조철현이 국내 정세를 설명한 후 정인영이 독립만세를 선창했으며 박정순·김은환·이병영·박병문·조희방 등이 시위행진을 주도했다.
또 영광보통학교 150여 학생들은 교정(현 영광향교)에서 미리 제작한 태극기로 만세를 고창한 후 교촌리를 출발해 도동리 남쪽(옛 군내버스정류장) 방향으로 행진했다.
이들 학생들은 이병영과 정헌모·허 봉의 주도하에 영광읍내로 향하던 과정에서 군민 150여명 이상이 합세해 300여명으로 불어나는 가운데 남천리 조희경의 정미소(전 강남예식장) 앞에서 왜경과 충돌했다.
이들 시위대는 “당일 나는 보통학교 생도들과 같이 만세시위의 최선봉에 섰었다”는 조철현의 진술과 같이 본래의 계획대로 모두 합류하는 가운데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며 대한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날 조철현과 이병영·정헌모·허 봉·조술현은 현장에서 왜경에게 체포돼 시위대는 오후 5시경에 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다음 날 15일에는 왜경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더욱 격렬한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김은환·정인영·조희방·조병문·박정순·서순채·유두엽·김준헌 등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14일에 “영광면 남천리에서 조선독립운동이 있었을 때 그 집단에 참가해 국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는 조희방의 진술처럼 14일의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한 인물들이었다. 그 전개 과정은 다음의 판결문에 잘 나타난다.

피고 김은환·정인영·조희방·조병현·박병문·박정순 등은 전남도 영광군 영광읍 남천리 박정환의 직포공장에서 회합해 조선독립의 희망을 달성할 목적으로 다수의 조선인이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할 것을 모의해 그 실행 방법으로써 한국 태극기 수십본을 제작 준비해 동일 오후 1시경 동 공장 앞에서 조선 군중에게 유포했고 그들 수백명은 다함께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해 남천리·백학리·무령리를 경유해 영광경찰서에 쇄도했고 피고 서순채·김준헌·유두엽 등은 상기 진행 도중에 합세해 더욱더 격렬히 했다.

당일 정오에 전일의 소요보다 몇 배의 다중과 보통학교 생도, 졸업생 기타 읍내 양인 약 400명이 광기와 같이 만세를 연호하며 영광군청과 영광경찰서에 쇄도했고 그때 피고 박병문·정인영·김은환·조희방은 최선봉에 서고 서순채·김준헌은 그 뒤에서 군중을 향해 만세를 선창했다. 주먹을 쥐고 모자를 흔들며 군중을 선동함으로써 그들이 경찰서 구내에까지 들어가게 했다.

이들은 15일 아침에 남천리 직포공장에서 회합을 가진 후 오후 1시경에 태극기를 배포하고 만세운동에 들어가 도동·남천·백학리를 경유해 영광경찰서 구내까지 진입했다. 이들은 시위대 앞뒤에서 만세운동을 지도할 정도로 태극기의 제작과 배포에서 시위에 이르기까지 매우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했다.
더구나 이 날의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은 ‘합병 당시부터 조선독립의 사상을 가져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김준헌의 진술처럼 일찍부터 민족독립의식을 자각하고 독립쟁취를 도모한 독립지사들이었다.
특히 이 날의 운동은 ‘전일의 소요보다 몇 배의 다중’, ‘약 400명이 광기와 같이 만세를 연호’했다고 보고될 정도로 14일보다 더욱 격렬하게 전개됐다.
더구나 이날에 참여한 학생·군민은 판결문에 나타나는 것처럼 실제 500여명 이상이었던 영광읍 전체가 동참한 시위운동이었다.

조병현 등 약 10여명이 박정환의 직포공장에 모여 구한국 국기를 제작해 동 지방을 약 500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다.

이들의 판결문에 ‘주먹을 쥐고 모자를 흔들며’, ‘인력거를 타고 대열의 선두에 서서’, ‘남들보다 한층 더 즐거운 기분으로 크게 외치며’라는 내용을 통해서도 영광군민들이 14일의 만세운동에 크게 고무됐고 그 독립쟁취의 의지가 매우 강했음을 엿볼 수 있다.
또 이들은 ‘보통학교의 선생이 구류를 당하고 있으니 시위운동으로써 그들을 타취하자’는 조희방의 공술처럼 독립지사들을 수감한 일제의 만행에 격분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오랜 염원이었던 민족독립을 쟁취하고 14일에 수감된 교사·학생들을 구할 뚜렷한 목적을 갖고 식민통치의 무력장치인 영광경찰서에 쇄도 진입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일련의 사상자가 발생한 가운데 이를 주도한 김은환은 징역 2년에 정인영·조희방·조병현·박병문·박정순은 1년 6월을 언도받았다.
이러한 영광의 3·1운동 점화는 일제의 사건 분류에 따라 보통 1, 2차로 구분돼 이해된다. 그러나 이는 영광의 모든 지사들과 군민들이 규합해 최초의 1차 만세운동을 이틀에 걸쳐 전개하고 경찰서에 진입할 정도로 점화에서 최절정으로 이끈 강도 높은 항거이자 독립 제창의 뜻 깊은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정 택 근
·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영광문화원지역사연구소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