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상사화축제 시수필 인터넷 공모전
영광상사화축제 시수필 인터넷 공모전
  • 영광21
  • 승인 2019.10.18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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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

대상 - 강미란 / 충북 청주시

그리움의 꽃

세상의 풀들이 동면의 미몽을 털지 못하는 이른 봄이다. 겨우내 뿌리가 잔설에 꼬리를 묻고 있더니 둥근 뿌리 비늘줄기 끝에서 뾰족한 촉이 솟는다. 누구보다 먼저 풋풋한 잎사귀를 틔워 봄의 대지를 차지했다. 그런데 봄꽃의 향연이 펼쳐지는 순간부터 노랗게 말라 가더니, 여름 기운이 스며들 무렵부터 땅에 붙듯이 내려앉는다.
잎이 잦아든 자리에 이윽고 새로 솟아 비로소 피어나는 것이 있다. 새로운 생명을 틔워 세상을 여는 것이 있다. 그 꽃이 상사화다. 잎이 말라 흙이 된 자리에 그 흙을 뚫고 대궁이 솟아오른다. 대궁 끝에 꽃술이 생기고 홍자색 꽃이 피어나 한동안 세상을 밝힌다. 그러나 상사화는 잎이 달려 있을 때 꽃을 피우지 못하고, 꽃이 필 때 이미 잎은 없다. 한 뿌리이면서 꽃과 잎이 서로 만날 수 없어 그리움의 꽃이다.
5년전 처음 빛고을 영광에 발을 디뎠다. 딸이 대학졸업하기도 전에 한국수력원자력에 취업했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자식을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 두고 왔다. 남들은 안정된 직장이라 걱정이 없겠다 했다. 하지만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것도 안쓰러운데 집과 너무나 동떨어진 지역에 발령이 나니 마음이 무거웠다. 늘 딸아이에 대한 그리움으로 지냈다. 
그러나 딸은 차츰 영광에 새로운 뿌리를 내리고 삶의 잎을 키워갔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해마다 영광 관광명소를 다녔다. 내가 불갑사 상사화를 처음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노령산맥의 기맥으로 우뚝 선 모악산이 어머니 품처럼 불갑사를 포근히 안고 있었다.
상사화는 꽃무릇을 화려하게 피우기 위해서였던가. 주차장이 있는 일주문에서 실개천을 따라 이어지는 길섶에서 처연히 잎을 떨구고 있었다. 잿빛으로 변해가며 말라가던 상사화의 잎은 형체도 없이 땅으로 녹아들며 자취를 거두었나 보다. 잎이 말라 흙이 되었으리라. 나는 상사화를 바라보며 부모님 생각이 났다.
고등학교 입학 후였다. 친정아버지는 상사화 잎이 질 무렵 세상을 등졌다. 화장실을 다녀오다 묵은 정情이 가득한 안방까지 가시지도 못한 채 엄동설한 찬마루 바닥에서 쓰러졌다. 무엇이 아버지 마지막 길을 붙잡고 있었을까. 세상에 내려놓지 못한 미련이 남아서일까. 떨어지는 잎처럼 방황 없는 손짓만 허공을 향했다.
아버지를 애타게 불러도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다만 나를 향한 애절한 눈빛만 남기고 한마디 말도 없이 그렇게 떠나셨다.
아버지의 온기가 채 가기도 전인 대학 1학년때였다. 친정 어머님도 내 곁을 떠났다. 저승 떠나는 길 딸자식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담고도 모자라서였을까. 저승 가시는 날을 미리 염려하셨던 것인가. 늦둥이 시집가는 날 가져갈 원앙금침 한 채를 미리 만들어 두시고 눈도 감지 못한 채 세상을 등지셨다.
나는 부모님이 피워 놓은 한송이 상사화 꽃잎이었는지 모른다. 상사화는 잎을 떨구어 꽃을 피워낸다. 잎은 꽃을 피워 세상의 빛이 되는 날을 애절한 심정으로 기다리며 인내와 고통을 겪었으리라. 그러나 그 마음을 꽃은 짐작이나 했겠는가. 나 역시 살아생전 부모님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러다 서로 마주할 겨를조차 부여받지 못하고 순식간에 상사화의 잎이 떨어지듯 부모님은 내 곁을 떠나고 말았다. 잎은 피지도 않은 꽃을 그리며 애태우다 말라 갔을지 모를 일이다.
내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리 가슴에 딸자식 걱정거리만 가득 담고 떠나셨으리라. 그래서일까. 나이가 들수록 붉은 상사화 꽃잎처럼 내 가슴에 더욱 짙게 부모님을 향한 그리움이 물들어 갈 뿐이다.
상사화는 그리움의 꽃이고 서로를 생각하는 꽃이다. 꽃은 잎을 그리워하고 잎은 꽃을 생각한다. 그리움으로 줄기 곧은 잎들을 생기 차게 돋워 내다 말라 간다. 긴 대궁 위에 홍자색의 애틋한 마음을 피워내다 져 가는 꽃이다. 그렇다. 상사화는 어쩌면 ‘이룰 수 없는 사랑’의 꽃이 아니다. 마냥 그리움으로 피고 지는 꽃이다. 내 마음에도 상사화는 그리움의 꽃으로 피어있다. 그래서 부모님은 천상에서, 나는 지상에서 늘 그리워하며 사는지 모른다.
그리움이란 마음속에 그리는 그림이다. 살다 보면 아름다운 추억 속의 사람을 서로 그리워하며 산다. 그리움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있다. 우리는 들은 적도 본 적도, 그릴 수조차도 없는 시공간의 흔적을, 그런 사람을 못내 그리워하며 살기도 한다. 그리움은 내안에 함께하는 존재의 확인이다. 가슴속에서 ‘그리움’을 빼내면 내 존재조차 없어질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리움이 있어 존재의 의미가 더욱 드러나는지 모를 일이다.
그리움은 쉼 없이 피고 지는 꽃처럼 속절없이 오고 가는 것이리라. 꽃이 피고 지는 것이나 삶이 오고 가는 것도 순리라는 것을 세월 한 자락을 삭히고서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리워할 부모님이 있기에 그 그리움으로 나의 삶을 이끌어가고 삶의 여정을 더욱더 생기롭게 하리라. 그러니 이젠 부모님을 내 가슴에 그리움의 꽃으로 피워두고 보리라. 언젠가 부모님과 다시 천상에서 재회할 날 그리움의 끈이 닿을 수 있으리라.
불갑사 꽃무릇 따라 그리움으로 걷는다. 대웅전에서 스님의 목탁 소리, 불경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불갑사 가는 길 맑은 개울가에 핀 꽃무릇이 그림자를 드리워 물속에서도 빨간 꽃을 피워낸다.
그 속에서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이 그리움의 꽃으로 피어난다. 부모님의 사랑은 시들지 않는 꽃으로 내 가슴에서 빛나고 있음이다.
애절한 그리움의 빛깔로….
 

■ 은상 수상작 - 김근억 / 영광군  간이역에서

저 꽃무릇은
지난밤 달빛이 붉은 입술로 산기슭마다 새로 찍어놓은 키스마크
그걸 보며 사람들은 수런수런
각자의 우물에서 잃어버린 추억들을 건져 올리네
찰칵찰칵
건져내면 건져낼수록 축제는 깊어가고
침묵도 깊어가네

날빛에 드러난 숫처녀의 당황스런 붉은 옹알이처럼
말할 수 없음으로
혼자 길어진 꽃술이 슬픈 힘으로 다만
푸른 바람 한입 베어 물고
푯대 끝에서 침묵하며 공후를 탈 때
간이역에도 정차할 구월의 기차는 온다네

그리하여
비단옷으로 맵시부린 라니아케아로 가는 저 기차
빠아앙~ 빵  이마에서 황금색 기적하나 뽑아들고
불갑사역에 정차할 즈음엔
차창마다 붉은 그리움들을 그렁그렁 메어 다는 것인데,
구월의 저 물가에 비친 순환열차의 그림자엔
아직 그의 모습은 없다네
비밀을 품고 떠난 그의 얼굴은
온다는 말 한마디 없이 떠난 무정한 이의 웃음은

저 검붉게 바래가는 꽃무릇 아직
허공을 애면글면 잡고 있는 가을날 그는 다만
참식나무 오르내리며 겨울 준비에 분주한 다람쥐로 머물고 말것인가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인적 끊어진 한겨울에
아직은 동백의 심장을 가진 부도탑으로 그를 기다릴 때
먹이 찾아 기웃기웃 연실봉을 내려오는 고라니 모습으로 오려는가
가슴속에 스멀스멀 일어나는 추억의 얼굴을 더듬어
회색점괘를 뽑아내며 나는 아직
불갑사 문설주에 기대어
다음 기차를 기다리네
다시 공후를 드네

기차는 구월에 떠나네
즈믄년의 기다림도 덧없다는 듯 떠날 이들은 떠나고
사랑은 오지 않아도
기다림은 사랑의 이름으로 충분하기에
말라가는 저 꽃무릇처럼 검붉은 눈동자로
불갑사의 푸르른 종소리 안에 머무르는 것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