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상 수상작 - 김용례 / 충청북도 청주시
불갑산 - 산사에서 듣는 빗소리
가혹했던 여름 햇살도 누그러졌다. 봄과 여름 내내 지독하게 시비를 걸어오던 풀들과의 싸움도 시시해졌다. 그런데 이제는 놀고 있는 햇살의 멱살을 내가 움켜쥐고 있다. 시골 살림을 하다보면 짧아진 가을볕이 아깝다. 보다 못한 남편이 오늘은 비도 내리니 우리도 영광가서 굴비도 먹고 꽃무릇도 보잔다. 굴비, 꽃무릇이란 말에 귀가 번쩍 열린다.
비를 맞은 산야가 촉촉하다. 불갑사로 들어오는 십리전부터 도열한 꽃무릇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꽃무릇 최고의 날은 지났다. 꽃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절정의 순간을 만나는 해는 왠지 모든 일이 잘 될 것 같은 근거 없는 설렘의 시간을 보낸다. 이 또한 자연이 우리에게 베푸는 은총이다. 불갑사에는 세계최고의 금속활자 직지 목판본이 있다 하여 늘 관심이 있었다.
불갑산 품에 안긴 불갑사, 비가 내리는 불갑사는 더없이 고졸하다. 절집의 기와지붕에는 빗물 받침이 없다. 그래서 기와 골골마다에서 빗물이 떨어진다. 어떤 연주자가 이처럼 소박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줄까. 단순하고 순결한 소리, 만세루 툇마루에서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단조로운 음에 묘한 끌림이 있다. 지루할듯한데 지루하지 않다.
만세루 지붕에서 마당으로 토닥토닥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서 그녀와 나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비 오는 날 교복을 입고 우산도 없이 비를 쫄딱 맞으며 걸었다. 교복과 머리가 흠뻑 젖은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깔깔거렸다. 티 없이 맑은 웃음이었다. 살면서 가식 없이 맑고 환하게 웃었던 적이 있었던가 싶다. 여고시절 단짝이었던 우리는 늘 붙어 다녔다. 졸업을 하고 우리가 20살 어느 날 그녀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는 한참을 방황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내가 아이 둘을 낳고 큰애가 유치원 다닐 무렵 그녀가 찾아왔다.
머리를 깎고 재색 두루마기를 입은 너무나 낮선 모습으로 내게 왔었다. 나는 구도자의 길을 가는 그녀가, 그녀는 엄마가 되어 있는 내가 너무나 어색하여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었다. 어느 절집에서 정진하고 있을 그녀가 오늘 보고 싶다.
불갑산이 흠뻑 젖어 있다. 나무들이 촉촉하다. 한번도 산사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편안하게 머물렀던 적이 없다. 절집마당을 사박사박 걷는 내 발자국소리가 조금은 쓸쓸하지만 따스한 위안이 되기도 한다. 동동거리며 여기까지 걸어온 내게 주는 휴식 같은 시간이다. 호젓하게 즐기기엔 더 없이 좋은 날이다.
세심정이 있는 일광당 뒷마루가 아늑하다. 여기서 듣는 빗소리는 묘한 마력이 있는듯하다. 낭만도 있고, 슬픔도 있고, 쓸쓸함도, 따뜻함, 감사한 마음. 물은 아래로 흐른다는 진리의 말씀도 들리는 듯하다.
나는 누구에게 시원한 물 한모금으로 살아 왔는가.
내 인생은 오랫동안 가뭄이 들었었다. 먼지만 풀풀 날렸다. 떨어지는 빗소리가 살아오느라 고생했다고 내 등을 토닥토닥 어루만져 준다. 삭정이처럼 메마른 내 가슴, 불갑사 부처님 품에서 촉촉해진다.
어느 하루, 만세루 툇마루에 앉아 대웅전을 바라보고 있으면 핏대를 세웠던 일들이 무심해지리라. 혼곤히 자고 일어난 듯 다시 살아갈 힘이 생긴다. 그가 어디 있든 무슨 일을 하든 결국 우리는 빗물처럼 흘러 흘러 바다에서 만나게 된다. 나이를 먹으며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들꽃이 그러하고 가을 햇살, 걸어가는 노인의 굽은 뒷모습,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 내게 아무 관심도 없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들은 너무나 바삐 살아간다. 이렇게 어느 가을날 산사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삶을 뒤돌아보고 자연이 하는 말에 귀 기울여 볼일이다. 타박하기보다는 감사의 마음이 생긴다. 하루 종일 비가 올 모양이다. 빗소리를 들으며 타박타박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