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불갑산상사화축제 기념 인터넷공모전 수상작
2019 불갑산상사화축제 기념 인터넷공모전 수상작
  • 영광21
  • 승인 2019.11.01 10: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꽃 천지 상사화 불갑산에 들어

■ 은상 수상작 - 김회권 / 광주광역시 서구

늘 꿈결 속에서만 노닐었다. 언제고 가고픈 산이었으나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며 추상抽象으로만 바라보던 산이었다. 그 불갑산을 오늘 가을의 문턱에 아내와 함께 찾아들었다.
한창 꽃무릇축제 때문일까. 불갑사 입구에 들어서자 소문처럼 상사화가 눈앞에 즐비하게 펼쳐져 있다. 마치 빠알간 물감을 흥건히 풀어놓은 듯 사방천지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참으로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이리 드넓은 공간에 이토록 많은 상사화를 피워낼 수 있을까. 그 위로 해맑은 햇살마저 깨알처럼 부서져 내린다. 어디를 보나 활활 타오르는 불같고 저녁노을마냥 붉기만 하다. 그 장엄한 모습에 절로 탄성이 나온다. 아내는 꽃에 도취되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느라 바쁘다.
한동안 상사화에 취했던 우리는 불갑사를 시작으로 산행을 해보기로 했다. 숲 그늘에 들자 깊게 무르익은 가을빛이 허리만큼 차오른다. 사각사각 낙엽 밟히는 소리도 귀 맑다. 어디쯤 군락을 이룬 기운 뻗은 참식나무들이 서로의 이파리를 부비며 스르륵 스르륵 소리를 낸다. 가을이 만들어낸 그윽한 풍경 소리다.
이처럼 아름다운 불갑산을 곁에 둔 영광군민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처음 찾아든 내게도 이처럼 아늑한 편안함과 기쁨이 찾아드니 말이다.
가만히 그냥 두고 바라만 봐도 불갑산은 저가 알아서 척척 멋들어지게 옷을 갈아입나 보다. 게다가 사람들의 무게에 눌려 신음하면서도 어찌 저리 철 따라 고운 꽃들은 피워낼 수 있을까. 그 지순함에 나의 탐욕과 질투가 절로 부끄럽다.
불갑산의 변화는 제일 먼저 빛으로 오나 보다. 안 그러고서야 어찌 저리도 고운 파스텔 물감을 지닐 수 있단 말인가. 쪽빛보다 짙고, 푸른 심연의 바다보다 아늑한 절경이 눈빛 환하다. 게다가 주변 일대엔 숲이 울창하고 산세가 아늑하다.
내 처음 찾아드는 발길은 머뭇거리거나 망설일 필요가 없다. 드는 길목마다 친절하게 안내표시판이 붙어있기 때문이다. 잠시 바윗돌에 걸터앉아 가쁜 숨을 몰아쉰다. 어디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일까. 옷깃을 시원스레 파고드는 게 가슴 환하다.
우리는 이제 바삐 오를 필요가 없다. 꽃잎 열리듯 천천히 느긋하게 오르면 된다. 대하는 숲길마다 두루뭉술한 산자락이 있어 좋고, 이름 모를 갖가지 산새들의 구성진 울음소리가 있어 좋다. 더욱이 만화滿花의 풍경에 눈과 마음을 씻을 수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한 마디로 일장춘몽 인생을 담금질하며 벗처럼 오고 가도 좋을 산이다.
중턱 어디 쯤 오르자 널따란 바위에 걸터앉은 노부부가 우리에게 가까이 오라며 손짓을 한다. 그리고 싸맨 도시락을 펼치며 자리를 내준다. 우린 눈인사로 그치려 하는데, “늙은이가 만든 음식이라오. 맛 한번 보고 가시오” 하며 아내의 손을 이끈다.
곱게 양념된 돼지갈비다. 할머니는 상추 위에 깻잎 한장을 더 겹쳐 적당히 익은 살코기와 쌈장을 묻힌 마늘과 고추를 그 위에 꽃처럼 얹어 아내의 손에 쥐어 준다.
“간이 맞을지 몰라. 천천히 씹어 드세요.”
아랫사람이 먼저 챙기고 드려야 도리인데 노부부의 정감어린 마음씨에 우린 어찌할 줄을 몰랐다. 부끄럽고 또 감사했다. 정이 묻어난 그 음식 하나에 몸과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찼다.
이제 오르막길은 지침 없이 가벼웠다. 어느덧 불갑산 정상 연실봉에 오르자 서쪽으로 짙은 물결 바다가 한눈에 보인다. 멀리 내륙쪽으로는 광주 무등산과 담양 추월산이 아스라이 펼쳐져 있다. 수많은 풍경과 사색의 초발初發을 봇물처럼 뿜어내는 게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눈 아래 펼쳐진 갖가지 풍경들이 나를 중심으로 모여드는 것 같다. 나는 가만히 그 중심에 앉아본다. 태초의 음성인가. 산이 들려주는 고요한 외침과 구명할 수 없는 암호들이 절로 해독된다.
그때 한줄기의 바람이 ‘쏴~아’하고 불어대자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새벽녘 지저귀는 산새들 울음만큼 청아하다. 세상 그 무엇으로도 흉내 짓거나 따를 수 없는 자연만의 소리다. 이 자연이 들려주는 색다른 감흥에 나의 무딘 감각이 화들짝 깨어난다.
얼마쯤 능선을 타고 내려오자 이끼 낀 바위에 야생화 한송이가 곱게 피어있다. 그 옆 발 빠른 다람쥐 한마리가 낮게 드리워진 갈나무 사이에서 고갯짓을 한다. 저도 낯부끄러운지 마주친 눈빛에 저편 가지로 휘익 숨는다. 그 작은 몸짓이 참으로 앙증맞다.
어디쯤 올려다보니 오동나무 잎새들이 새처럼 앉아있다. 그 위로 살며시 얼굴 내민 솜뭉치 같은 흰 구름들이 소풍가듯 몸 가볍게 둥둥 떠다닌다.
어느 곳이든 눈 닿은 곳마다 순한 감동이다.
나도 저와 같이 봉우리 감싸 안은 단풍띠마냥 마음의 띠를 곱게 두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혹은 바람결에 너울대는 억새마냥 삶의 들판에 저리 아름드리 수놓을 수 있다면 오죽 좋으랴. 그러면 내 안의 오만과 불손, 시기와 질투, 그 무엇 하나 머물거나 싹트지 못할 것을.
이 가을이 빚어낸 불갑산. 이 눈부신 풍광의 결실이 어찌 물과 바람과 햇빛뿐이랴. 전설처럼 산을 찾는 산사람들의 청순한 마음까지 버무려지고 담금질되어 솟아오른 산이 불갑산 아닌가. 한 떨기 곱게 피어난 추국秋菊도 이에 비하지 못하리라.
정말이지 오늘 불갑산에 찾아들기 참 잘했다. 나는 이제 이 산을 내려서면 일상으로 돌아가리라. 그리고 산은 산으로 바람은 바람으로 남을 거다.
내리막 능선 길은 급할 것도 재촉할 일도 없다. 가쁜 숨 몰아쉴 이유도 없다. 그저 낙엽처럼 가볍게 발길 내딛으면 된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소나무 숲길을 지나 사람 사는 마을로 내려오는데 자꾸 뒤를 돌아본다. 백년을 쉬어가도 좋고, 천년을 발 묶여도 좋을 불갑산이 “언제 다시 찾아올 것이냐고” 내 고향 친구마냥 돌아서지 않고 묻는 것 같다. 나는 그에 대답하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