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사범학교 재학중에 성진회(독서회의 전신)에 가입해 활동한 사실이 있다 해 곡성군 석곡면 소재 석곡보통학교 훈도 재직중인 1929년 12월29일 왜경에게 검속돼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룬 사실이 있다.
그러나 일제때인 1938년 12월1일부터 1945년 8월15일까지 백수면장을 행한 그의 행적에 많은 문제점이 야기돼 더 이상의 내용을 여기에 수록할 수 없다는 편찬위원회의 전체 결의에 의해 생략한다. 현정부에서 후일 친일파 행적을 밝혀 내는 날까지 유보한다.
남궁조
목포공립상업학교 3학년 재학중 광주학생독립운동에 가담했는데 당시 목포상업학교는 한국인 학생 120명과 일본인 학생 130명을 함께 수용하고 있는 한일공학의 학교로서 거의 날마다 일인학생과의 충돌이 있어 평소부터 배일사상이 움터 있던 학교였다.
광주학생봉기 소식을 접하자 바로 대표 2인을 광주로 파견해 광주학생봉기의 주모자인 광주고등보통학교 출신 장재성(張載性)과 맞나 긴밀한 제휴를 갖고 돌아와 동교의 한국인 학생 전원을 규합해 11월19일 상오 12시30분을 기해 동맹휴학을 선포하고 시위행진을 감행했다.
이날 남궁조도 이 대열에 참가했다가 왜경에게 체포돼 불기소처분을 받고 석방은 됐으나 학교 당국으로부터는 퇴학처분을 당했다. 그후 향리인 법성으로 돌아와 위계후 선생 등 선배들의 지도하에 계속 민족운동에 참여해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34년 4월 영광에 있어서 민족운동의 마지막 보류였던 영광체육단 창단에 참여, 운영위원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다가 1937년 9월17일 왜경에게 검거돼 1938년 4월12일까지 무려 7개월 동안을 영광경찰서 유치장에서 묘량지서 유치장과 불갑지서 유치장으로 옮겨가면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석방됐으나 왜놈들에게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정신이상이 생겨 1938년 4월14일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세상을 떠났으니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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