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살면서 힘든 것이 하나도 없었어. 어려서도 순탄했고 결혼해서도 순탄했어. 아침밥을 먹은 후에 남편은 남자노인당으로 가고 나는 여자경로당으로 와. 노인연금이 나와서 병원에도 다니고 경로당에도 다니고 지금이 젊었을 때 보다 더 좋아.”
염산면 운송정경로당에서 만난 박창열(86) 어르신은 밝은 웃음을 갖고 있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다른 어르신들이 건네는 농담으로 경로당 안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박창열 어르신은 염산면 오동리에서 태어났다. 친정은 땅이 많은 부잣집이었다. 일꾼이 두명일 때도 있었고 세명일 때도 있었다.
박 어르신은 여덟살이 되던 해 군남초에 입학했다. 염산에서 한시간이 넘는 거리를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힘든 줄도 모르고 아침마다 걸어서 학교로 갔다. 8·15광복 전이어서 일본어로 공부를 시작했는데 3학년까지 다니고 할아버지 병간호를 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박 어르신은 스무살에 고창군 대산면 지석리에 살고 있던 남편 김용순씨와 결혼을 했다. 시댁도 땅이 많은 부잣집이었다.
“30대 초반에 염산으로 와서 사거리에서 신발장사를 시작했어. 83살이 될 때까지 50년 동안 신발가게를 했어. 신발가게를 접은 지 3년째야. 하루에 한켤레를 팔면 한켤레를 파는대로, 두켤레를 팔면 두켤레를 파는대로 장사를 계속했어. 그래서 수중에 돈이 없었던 적은 없어.”
박 어르신은 2남 4녀를 낳아서 모두 잘 가르쳤다. 딸들도 고등학교를 모두 졸업시켰다. 새벽에 여섯 아이의 도시락을 싸야 하는 날도 있었다. 도시락 싸는 것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고 한다.
박 어르신은 갑계에서 친구들과 함께 매년 봄이면 꽃구경을 다녔고 70년대 중반에 호주 시드니로 7박8일 동안 여행도 다녀왔다고 한다.
봄마다 꽃구경을 다녀서 우리나라에서 좋다는 절은 모두 다녔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장성 백양사를 좋아한다고.
“나는 장사가 잘 맞았어. 신발 팔아서 애들을 가르쳤어. 남편이 아침에 문만 열어주고 나가면 내가 다 알아서 했어. 고생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 염산은 바닷가가 있어서 여자들이 바닷일도 하고 뙤얏볕에서 농사일도 했어. 나는 농사일도 안하고 장사만 했으니까 더 편했지.”
박 어르신은 “장사하고 애들 키우면서 살았어. 누구한테 크게 의지하지 않고 내 힘으로 돈 벌면서 사니까 편했어. 지금도 남편이 잘 해줘”라고 말한다.
박 어르신은 유쾌한 어조로 강인하게 살아온 평생을 담담하게 풀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