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슬프지 않았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슬프지 않았다
  • 영광21
  • 승인 2020.06.11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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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의병 훈련하며 머물렀던 ‘화순 쌍산의소’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 바친 분을 기리는 달이다. 6월의 첫날, 1일은 ‘의병의 날’이었다. 
의병은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고 나라를 구하고자 자발적으로 몸과 마음을 바친 분들을 가리킨다. 나라가 전쟁 등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등장한다. 
단재 신채호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다. 우리의 미래이기도 한 의병마을을 찾아가는 이유다. 
일제강점기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박은식은 ‘한국의 의병투쟁은 전라도에서 가장 활발했다’고 했다. 
일제에 의해 희생된 한말 의병이 1만5,000여명, 이 가운데 호남의병이 절반 안팎을 차지한다. 남도 곳곳이 항일 의병의 싸움터였다.


항일 의병 자취 남은 유일한 유적지
화순 증동마을에는 의병 훈련장과 지휘본부가 있었다. 쌍산에 있는 의로운 장소, 쌍산의소雙山義所다. 쌍산과 증동마을을 거점으로 활동했던 항일 의병의 진지다. 여기에 가면 한말 의병들이 어떻게 싸움을 준비하고 활동했는지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다.
쌍산의소는 쌍봉사 인근, 화순군 이양면 증리 계당산 자락에 있다. 오래 전에 ‘쌍봉’, ‘쌍치’로 불렸던 쌍산의 왕피골이다. 왕피골은 기름진 나주평야를 적시는 영산강의 상류 줄기인 지석강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왕피골에는 한말 의병들이 방어용으로 쌓은 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의병들이 함께 먹고 자며 훈련했던 막사와 훈련장도 있다. 의병들이 탄약과 무기를 만들던 대장간 터, 탄약의 재료인 유황을 채취했던 유황굴의 흔적도 보인다.
의병성은 높이 80㎝ 안팎의 돌로 길게 담을 쌓은 형상이다. 그 안에 둥글고 네모 난 낮은 돌담이 불규칙하게 늘어선 곳이 막사 자리다. 제법 넓은 터는 의병들의 훈련장이다. 전남문화재연구원에서 시굴조사를 통해 건물 자리 4동을 확인했다. 건물의 출입구로 추정되는 시설까지 찾아내 학계의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성의 규모에 비해 흔적이 또렷하지는 않다. 일제의 눈을 피하려고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않은 탓으로 추정된다. 쌍산의소가 항일 의병의 자취를 더듬어볼 수 있는 유일한 유적지로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쌍산의소는 의병들이 머물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깊은 산중이어서 일제의 눈을 피하기 쉬웠다. 그만큼 의병을 모으고 활동을 하기에 유리했다.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재료를 공급하고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산골 주민의 도움을 받기에도 수월했다.
 

 

의병 처음 결의한 임노복의 집 복원
쌍산의소 의병은 행사 양회일(1856∼1908)이 첫손가락에 꼽힌다. 임창모·안찬재·임노복·임상영도 있다. 학포 양팽손의 후손인 양회일은 능주에서 태어났다. 
을사늑약 이후인 1906년 말부터 의병으로 나섰다. 증동마을의 유지 임노복과 함께 의병활동을 결의했다. 뜻을 같이한 장정들과 함께 의병성과 막사, 무기제작소를 직접 만들고 전투부대를 꾸려 겨울동안 훈련을 했다.
1907년 3월, 양회일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기치를 높이 들었다. 단숨에 능주를 점령했다. 연이어 화순으로 진격해 관아와 분견소를 습격했다. 동복을 거쳐 내친김에 광주로 향해 가다가 일본군의 기습을 받았다. 그의 행적이 제주 양씨 화순문중에서 펴낸 〈행사실기杏史實紀〉에 적혀 있다.
쌍산의소는 2007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됐다. 문병란 시인은 시 ‘불멸의 사랑’을 지어 쌍산의소 항일의병에게 바쳤다.
‘명예를 탐하지 않았기에/ 호화로운 무덤이 필요 없었고/ 황금을 구하지 않았기에/ 빛나는 청석靑石을 원하지 않았다.// 족보에 새기고/ 사서에 장식하고/ 공과 훈을 원하지 않았기에//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슬프지 않았다.…’
양회일이 이끈 의병은 쌍산을 거점으로 활동하며 우리 의병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양회일이 임노복과 함께 의병을 처음 결의했던 집이 증동마을에 복원돼 있다. 양회일이 1906년 12월, 당시 이 집의 주인 임노복을 찾아 의병활동을 모의했던 집이다.
이후 임노복의 집은 의병지휘본부가 됐다. 군량미 비축창고 역할도 했다. 폐허가 돼 사라진 집을 화순군에서 2006년 기와집으로 복원했다. 쌍산의소 의병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 의병사도 세웠다.
의병들이 쌓은 성과 막사 터, 무기제작소, 의병창의소는 차를 타고 돌아볼 수도 있다. 깊은 산골이지만 임도가 잘 단장된 덕이다. 비포장 산길 드라이브를 겸해 쉬엄쉬엄 돌아보며 호젓한 숲을 만끽하면 더 좋다. 
전남새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