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 비 내리는 날 더 운치 있다
고택, 비 내리는 날 더 운치 있다
  • 영광21
  • 승인 2020.07.16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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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기둥부터 사랑채까지 
자연미 살아있는 군남 매간당

 

장마철이다. 비가 내리면 여행이 번거롭고 불편한 게 사실이다. 비 내리는 날, 더 운치 있는 옛집으로 간다. 옛집의 마루에 앉아서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보고 처마 끝으로 떨어지는 빗물을 보며 편안히 쉴 수 있는 곳이다. 호젓한 분위기도 좋다. 군남 매간당 고택이다.
옛집은 언제라도 고즈넉하다. 비나 눈이 내리는 날엔 운치까지 더해져 더욱 멋스럽다. 여기서 하룻밤 묵는 고택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고택에 스며있는 이야기를 듣고 예술공연도 보며 주변 여행지까지 돌아보는 1박2일 프로그램이다. 편리함만을 추구해 온 현대인들이 옛날로 시간여행을 떠나 약간의 번거로움과 불편을 체험해보는 여정이다. 문화재청과 전남도, 영광군이 지원하고 있다. 

겹처마에 팔작지붕 한 솟을대문 압권
군남면 동간리에 있는 매간당은 조선 후기의 상류층 집이다. 규모가 큰 12동의 집이다. 1868년 김영이 터를 잡고 지은 연안김씨 직강공파의 종택이다. 용 문양을 한 삼효문이 솟을대문으로 우뚝 서 있고 조상을 모시는 사당과 아이들을 가르쳤던 서당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국가민속문화재(제234호)로 지정돼 있다.
위풍당당한 모습의 솟을대문은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한 바깥 대문이다. 여의주를 입에 문 용머리 장식이 양쪽으로 배치된 두칸 대문이다. 한쪽의 좁은 문은 일상의 출입문이고 넓은 문은 가마에 앉은 채 드나드는 곳이다. 집안에 큰 행사가 있을 때도 활짝 열었다고 한다. 대문의 기둥도 따로 다듬지 않은 아름드리 소나무 기둥을 그대로 썼다. 자연미가 배어있다.
솟을대문의 2층은 유리로 둘러싸여 있다. 비바람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정려각이다. 대문과 정려를 함께 뒀다. 안에는 고종의 형이자 흥선대원군의 큰아들인 이재면이 쓴 ‘삼효문三孝門’ 현판이 걸려 있다. 이 집안의 2세손 김진(1599~1680), 7세손 김재명(1738~1778), 8세손 김함(1760~1832)의 효를 기리고 있다. 대를 이은 효를 나라에서 인정해 내렸다고 전해진다.
김 진은 70살의 고령에도 색동옷을 입고 부모를 즐겁게 했다. 부모상을 당하자 3년간 죽으로 연명했다고 한다. 김재명도 부모상을 당해 시묘살이를 했다. 그의 효성에 호랑이도 감복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김함은 한겨울에 두꺼비를 구해 부모의 병을 구했다고 전해진다.
정려각은 솟을대문의 내부 계단을 통해 올라가서 볼 수 있다. 2층의 창문을 열면, 창밖으로 집안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높지 않은 뒷산이 고택을 둘러싸고 있다. 집터가 매화 떨어진 자리이고 학의 형상으로 길지라고 전한다. 사랑채와 안채가 북향을 하고 있는 것도 별나다.
반대편 창밖으로는 집 부근의 넓은 들이 펼쳐진다.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어 솟을대문이 전망대 역할까지 해준다.

 

주인과 집을 한몸처럼 여긴 사랑채
매간당은 115칸 집이다. 사랑채와 안채, 별당, 사당, 곳간채, 중문, 마굿간, 헛간으로 이뤄져 있다. 정원과 연못도 있다. 7칸의 사랑채는 1898년에 지어졌다. 매간당梅澗堂, 익수재益壽齋, 구간재龜澗齋 등 3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매간당은 산속 물가에 핀 매화를 가리킨다. 남의 눈치 살피지 않고 소박하게 지조를 지키며 살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익수재는 나이가 들수록 더욱 밝고 건강하게 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구간재는 산골짜기의 작은 도랑물까지도 조심하는 거북이처럼 매사 무겁게 행동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매간당은 이 집의 10대손 김사형(1830~1909)의 호다. 익수재는 11대손 김혁기(1851~1897), 구간재는 12대손 김종관(1870~1943)의 호이다. 주인과 집을 한몸처럼 여긴 건축물이다.
사랑채 정원에서 중문을 들어가면 ㄷ자 모양의 안채와 一자의 아래채를 만난다. 뒤뜰에는 초가집이 2동 있다. 집을 지키는 사람들이 살던 호지집이다. 대가의 넉넉한 살림살이를 짐작할 수 있다.
서당채의 마룻바닥에 조그맣게 파인 물벼루도 눈길을 끈다. 먹을 갈아 쓰는 먹벼루가 아닌 마룻바닥을 활용한 벼루다. 옛날 선비들이 오랫동안 책을 보면서 발목 복숭아뼈에 눌려 파였다가 마루에서 구슬치기를 한 흔적이라는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해지는 자국이다.
종이가 귀하던 시절, 여기에다 물을 담아두고 붓끝에 물을 찍어서 마룻바닥에 글을 썼다. 난초도 그렸다. 마룻바닥을 종이 삼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흔적이다.                            

/ 전남새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