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조명 24 - 영광 교육의 발자취 ②

광흥학교
1908년 조찬승 편용무 등 영광의 중견 인사들이 뜻을 모아 관서당, 노인당, 향교서당 등의 재산을 처분해서 마련된 자금으로 향교의 명륜당에 광흥학교를 설립해 인재양성의 터전을 마련하고 초대교장에 편용무가 취임했다.
광흥학교는 약 2년간 운영되던 중 1910년 한일합방의 비통속에 학생들은 국권회복을 위해 거의 날마다 거리로 뛰쳐나와 한일합당 반대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계속하니 이를 심히 못마땅하게 보아온 일제는 개교 2년만에 폐교조치하고 말았다.
당시 광흥학교의 학제는 1년간의 숙성과정으로서 제1회 졸업생 35명을 배출했는데 그 면모를 보면 정인영 김은환 조희충 조병모 이 인 조융현 박동규 정동립 김창섭 정관철 외 25명이다.
영광보통학교
1910년 일제는 조선총독부 명에 의해 강압적으로 광흥학교를 폐쇄하고 바로 그 자리에 영광보통학교를 설립, 광흥학교 재학생 120명과 신입생 140명 등 260명을 수용했다.
이때부터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한 식민지교육이 시작됐는데 1912년부터는 종래 실행해 오던 학생들의 연합운동회의 금지령을 내리는 등 갖은 방법을 다해 한국인들의 단합을 막으면서 한편으로는 한민족의 분열을 조장하고 우리 고유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는데 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던 1919년 3ㆍ1운동이 발발하자 박태엽 이병영 훈도를 선두로 전교생이 두 차례에 걸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하다가 박태엽 이병영 두 훈도와 생도 대표 정헌모 등 10여명이 일본헌병과 경찰에 의해 검거되고 약 50여명의 부상자를 내는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
이로 인해 일제는 이 학교를 철저하게 감시하기 위해서 1920년 4월 전격적으로 경찰서 앞 현영광초등학교(당시까지는 이조때의 영광군청 객사로서 동제 서제 정문 청지기집 등 많은 건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로 옮겨져 이 고장 굴지의 전통어린 학교로서 건재하다.
또한 개교 당시에서부터 1919년 3ㆍ1운동 당시까지 이 학교에 재직했던 훈도로는 교장은 왜인 오쓰까(大塚) 한 사람과 조병모(영광출신, 1910~14), 위계후(창평출신, 1914~19), 이병영(진도출신, 1914~19), 박태엽(임실출신, 1914~19), 박용하(화순출신, 1916~19), 김문규(곡성출신, 1917~19) 등이었다.
이병영과 박태엽은 3ㆍ1운동 당시 구속돼 2년간의 옥고를 치루었고, 위계후는 3ㆍ1운동의 배후 주모자로는 알고 있었으나 증거가 확실치 않아 구속된 지 6개월만에 석방돼 훈도직을 파면당했다.
영광유치원
3ㆍ1운동 직후 한민족의 얼을 말살하려는 일제의 식민지교육은 날로 혹독해지고 겨레의 앞날은 어둡게만 여겨지던 때 이 고장의 우국지사들은 자라나는 어린 새싹들에게 올바른 민족의 얼을 심어 주자는데 뜻을 모으고 1921년 2월 위계후 선생과 10여명의
청년회 임원들이 모체가 돼 영광유치원 설립을 추진하자 독지가 조희성이 설립기금 전액을 부담해 영광읍 도동리 309번지에 세워져 1921년 3월부터 1926년까지 노윤창 선생에 의해서 운영돼 오다가 1927년 3월 영광읍 무령리 소재 영광읍교회 별관으로 옮겨졌다.
그후 10년이 지난 1936년 4월 유치원 건물이 수업도중 붕괴돼 원아 6명이 압사하고 많은 어린이들이 부상을 입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이에 충격을 받은 군민들은 친자식을 잃은 것과 같이 애통해하고 군민장으로 영광초등학교 교정에서 합동장례식을 치른 후, 그 자리에서 군민의 뜻을 모아 영광읍 도동리 287번지의 현영광유치원 자리에 터를 닦고 산뜻한 현대식 건물을 지어 1940년 1월11일 개원하게 됐다.
또 지금은 그 형태가 모호해졌지만 개원 당시에는 유치원 놀이터 남쪽 구석자리에 피어나지도 못한 채 죽어간 6명의 어린 넋을 위로하기 위해 위령동산과 연못을 만들고 매년 4월이면 위령제를 지냈다.
당시 영광유치원의 재건립은 많은 군민들의 성원으로 모아진 희사금을 비롯해 자모와 부인회의 정성어린 성금과 젊은 독지가 김동설이 내놓은 성금 5천원(벼 500석)의 설립기금으로 건립했다. 영광유치원은 원장에 김동설, 원감 조희관(해방후 목포항도여자고등학교 초대교장), 총무 정태일, 보모 조영순이 취임해 운영에 임했다.
유치원 설립은 전라남도에서는 영광이 처음으로서 당시 이 고장 어른들이 3ㆍ1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새로운 민족적 자각의 전환점을 마련하기 위해 건립한 거군적 교육기관으로서 그동안 군민의 아낌없는 성원속에 성장해 온 선인들의 얼이 담긴 전통깊은 유일한 어린이들의 산교육장으로 1924년부터는 청년회를 비롯한 지도층
인사들이 <동화회>를 구성해 매월 월례행사로 발전시켰고 각종 문화행사가 이 유치원에서 치뤄지는 등 이 고장문화의 산실이기도 했다. 또 조국을 빼앗겼을 때에는 우리의 쓰린 마음을 달래주며 미래의 희망을 안겨주는 유일한 위안처가 되어주기도 했던 어린 새싹들의 요람으로 수다한 파란곡절을 겪어 오면서 성장해 왔었다.
이후 1945년 8월15일 광복을 계기로 1922년 이래 영광군민의 숙원이었던 영광중학교 설립이 영광여자중학교와 함께 이루어지자 영광중학교가 들어서게 된 매전농장(梅田農場) 건물에 있던 신한공사를 영광유치원으로 임시로 옮기고 영광유치원은 영광여중학교 강당으로 옮겨 당시 영광민립중학교 설립후 그 운영의 주역을 맡았던 정주연학회(靜州硏學會)가 유치원을 맡아 운영하였다.
그후 뜻하지 않았던 6ㆍ25사변으로 문을 닫고 폐허가 되다시피 한 상태의 시설을 수복후 안정을 되찾게 되자 당시 영광중학교에 재직중이던 김자현(金子鉉·김동설의 종제)이 단독으로 시설복구에 나섰으나 그 과정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후 김자현은 주위의 친지들과 상의해 정주연학회 회원의 한 사람이었던 조응환을 비롯한 당시 여자청년단장 박금자와 독지가 염태열 등 제씨로 하여금 원장직을 맡아 운영에 참여케 한 보람이 있어 10년이 지난 1960년에 이르러 정상을 되찾게 됐다.
1961년부터는 줄곧 김자현이 원장직을 맡아 운영해 오다가 1979년에 이르러 운영진을 개편해 이사장에 김자현, 원장에 조영표(曺泳杓), 원감에 김 한(金 漢)이 취임해 1982년 3월 현재 제59회 졸업생을 배출한 이 고장의 대표적인 유치원으로서 건재하다.
그러나 한가지 아쉬운 것은 1937년 영광유치원이 대참사를 겪고 다시 건립되던 당시의 후원회장 위계후, 임원 조주현, 조규원, 정진삼, 이을호 등 다섯 사람의 공동명의로 소유권 등기가 돼있던 영광유치원의 부지인 영광읍 도동리 286의 3, 5, 9, 10번지 등 799여평의 재산이 1965년 정부가 시행한 바 있는 법률 1657호 농지특별조치법에 의해 모두 개인 소유로 그 소유권이 이전돼 뜻있는 군민들은 몹시 아쉬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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