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와 질투에 눈 멀어 사람을 해치는 자에게 - 2
시기와 질투에 눈 멀어 사람을 해치는 자에게 - 2
  • 영광21
  • 승인 2020.12.31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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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편지 16

제나라로 온 손빈은 자신의 이름을 빈으로 바꾸었다. 자신이 당한 형벌을 기억하고 방연에게 원한을 갚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기원전 353년 당시 사방에서 공격을 받던 위나라는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조나라를 공격했다. 방연이 군사 8만명을 이끌고 앞장섰다. 조나라는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제나라는 구원 여부를 놓고 고민 끝에 참전하기로 했다. 
이 때 장군 전기田忌의 집에 있던 손빈은 조나라로 구원병을 보내자는 의견을 물리치고 ‘위위구조圍魏救趙’라는 전술을 내놓았다. 위나라의 수도를 곧장 치자는 것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방연은 계릉桂陵에서 제나라 군대에 대패했다. 

방연이 이 전투를 통해 손빈의 존재를 알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 뒤에 벌어진 마릉馬陵 전투에서 방연은 손빈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실감할 수 있었다.
이 때도 상황은 전과 거의 비슷했다. 위나라의 공격 대상이 조나라에서 한나라로 바뀐 것만 달랐다. 손빈은 또 한번 위나라 수도를 곧장 공격했다. 방연은 수도가 공격 받는 상황에서 군사를 돌릴 수밖에 없었고 회군 중에 제나라 군대와 마주쳤다. 손빈은 일부러 패한 척하며 온갖 작전으로 방연을 유인했고 방연의 군대는 손빈의 미리 숨겨 놓은 제나라 군대가 기다리는 마릉에서 공격을 당해 전멸했다. 방연은 “내가 오늘 이 촌놈(손빈)의 명성을 세상에 알리게 만들었구나”며 자결했다. 
방연은 죽으면서도 손빈의 명성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질투했다. 동문수학할 때부터 손빈에게 가졌던 열등감이 결국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사실 방연은 손빈을 잘못 알고 있었다. 그냥 공부 잘하는 녀석으로만 알았다. 게다가 두 다리를 잃은 불구였으니 오죽 했겠는가?

착각은 내면의 공허함을 감추는 수단이고 그 공허함은 시기와 질투로 드러나고 결국 시기와 질투로 마무리된다. 그렇게 방연은 훗날의 영원한 비웃음을 잉태한 채 사라졌다. 손빈은 변치 않고 한결 같은 방연의 무모한 시기와 질투를 기다렸다가 복수했다. 장장 20년이 넘는 배신과 복수의 드라마였고 이 두 사람의 악연이란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누가 뭐라 해도 ‘시기와 질투’였다. 
방연은 지금 우리에게 이런 생각을 하게 한다. ‘아무리 해도 따를 수 없는 상대가 내 앞에 있다면 내가 지금 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다시 되돌아보라!’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지 않고 더 많이 공부하고 수양하지 않고 무조건 그 상대를 시기하고 질투하여 해치는 자는 설사 그 상대에 상처를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끝내는 자신이 죽는다.
자기 동창을 집요하게 헐뜯는 것은 물론 그 가족들까지 말과 글로 사정없이 해치려 했던 지금도 해치고 있는 사이비 지식인이 온 나라를 시끄럽게 만들고 있다. 이 자의 말과 글은 소음과 공해 수준을 넘어 오물에 다름 아닐 정도로 천박하고 사악하다. 

그 동창과 가족의 무고함이 속속 밝혀지고 있고, 그들에게 씌워진 모든 법적 혐의가 악덕 검찰, 기레기들, 적폐 세력 그리고 이 시기와 질투에 눈이 먼 사이비 지식인이 날조해낸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이 자는 반성과 사과는커녕 더 날뛰고 있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시기와 질투는 상식적인 판단을 마비시킨다. 여기에 자기과신과 과대망상이 겹치면 정신병으로 심화되고, 결국은 자신을 해치게 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사회 곳곳에 적지 않은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집단지성이 들고 나서 이 자의 준동을 심판해야 한다. 또 처절한 보복이 따라야 한다. 이미 보복은 시작됐고 심판도 뒤따를 것이다. 그 최후가 눈앞에 보인다. 다만 그 자는 자신의 최후를 모르고 있고 또 그 최후가 결코 오지 않으리라 확신하고 있다는 것 같다. 
하기야 무모하고 분별없는 시기와 질투는 눈과 귀 그리고 그 양심마저 가린다. 그 자의 최후를 덤덤하게 지켜보는 수밖에. 어쩌면 이 자도 죽으면서 그 친구를 질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이것도 역사의 데자뷰인가? 시기와 질투는 못난 자의 영원한 도피처다.

김영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