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최선을 다한 마음으로     
항상 최선을 다한 마음으로     
  • 영광21
  • 승인 2021.01.14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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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인권문학상 대상 / 생활체험수기 

2009년 어느 새벽 서서히 동이 트자마자, 막 떠오른 해는 마치 청명한 가을 하늘을 찌를 때 낯선 김해국제공항에 내려선 공항 활주로가 나를 반갑게 맞이해준다. 
하지만 간밤에 나는 이제부터 친정엄마, 가족 식구들과 내가 가진 모든 것, 심지어 베트남 고향까지 잊어버리고 오직 한국 남편 한 사람만 믿고 한국에서 홀로 살아가야 한다는 구슬픈 생각에 잠겨 제대로 한숨도 자지 못하고 낯선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중략) 
그런데 한국 생활적응에 문화 차이와 의사소통의 어려움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 한국에 오기 전에 베트남에서 이미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했고 나는 영어로도 일상 대화가 자신 있었는데 어느날 시장에 혼자 가 봤는데 한국 사람들의 말 속도가 너무 빠르고 사투리까지 사용하니 처음엔 한국말을 하나도 못 알아들었고 내가 영어로 말해도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고 영어를 모른다고 했다. 

또 내가 지나가면 시장 아줌마들이 “외국 사람이네”라면서 웃었다. 아마 내가 한국어 발음이 제대로 안 돼서 그런 것 같았다. 그래서 시장에 안 가기로 했고 동네에 있는 작은 마트에만 가는 반면 마트에 가도 의사소통이 여전히 잘 안 돼 많이 불편했다. 내가 사고 싶은 물건도 제대로 살 수 없어서 무척 답답했다. 그래서 한국에서 살려면 한국말을 잘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마음을 굳게 먹고 날마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한국말을 열심히 공부하게 됐다. 
게다가 남편은 현장에서 일하기 때문에 힘들다고 해서 일주일에 몇 번씩 술을 먹고 늦은 밤에 들어오곤 했다. 나는 혼자 집에 있으므로 유튜브 동영상들을 보고 하루종일 한국어만 공부했다. 머리가 아플 땐 밖에 나가 바람을 좀 쐬고 싶은데 한국말이 서툴러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누구한테 물어보기도 어렵고 결국 집에만 있게 되었다. 그러면 또 책을 읽고 한국말을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직장에 열심히 다녔지만 회사가 어려워 4개월 동안 월급도 제대로 못 받아 내가 가정생활을 알뜰하게 이끌어가야만 했다. 베트남 고향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얼마든지 마음대로 했는데 한국에 와서는 ‘이렇게 살아야 되구나’ 생각하면서 가끔 후회도 했다. 

만약 내가 베트남에 있다면 나도 직장에 다녀서 돈을 벌어 남편한테 경제적인 핍박을 줄여줄 수 있거나 힘들 때는 가족한테 도와 달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을 가끔 하곤 했다. 
이럴 때마다 집 앞에 있는 복도에 나가 혼자 우두커니 서서 먼 하늘과 산만 바라보면서 ‘타국에서 사니까 정말 외롭고 나는 아무 소용없는 사람이 됐구나’는 생각이 들고 또 속상해서 우울한 날이 엄청 많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베트남에서 한국 남편을 만나 연애하고 결혼한 후 한국에 간 것은 모두 내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했기 때문에 이렇게 힘든 한국생활도 참고 이겨내어 잘 적응하는 게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무너지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하고 더 열심히 한국말을 공부해 좋은 일자리를 구할 거라고 굳은 결심을 했다. ‘무조건 정상을 차지해야 된다’고 혼자 중얼거릴 때도 많았다. 
그러다가 아이도 가졌고 출산 3개월 되었을 때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 남편까지 간병을 하게 됐다. 
또 가정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내가 직접 현장에 나가고 곳곳에 다니면서 일을 했다. 식당 설거지, 모텔 청소, 채소가게에서 무거운 일을 한 것 등등 갖가지 힘겨운 일들을 다 해보았다. 늘 노력해 어려움을 극복했다.
몇년후 설날에 시집 식구들이 작은 아버님 댁에서 모여 작은 어머님이 나를 부르고 이렇게 말씀해 “서울이 너무 멀어 매년 서울까지 가서 제사 지내는 것이 어려워 이제부터 너의 집에서 제사 모시자. 제사 모신 것은 너의 책임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집만 빌려주면 돼. 차례 음식은 내가 다 할게”라고 하셨다. 남편이 장손이기 때문에 우리집에서만 제사를 모실 수 있다는 게 한국문화라고 하셨다. (중략) 
그래서 2013년 구정부터 지금까지 우리집에서 제사를 쭉 모셔왔다. 1년에 3번 제사상을 올리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어느 정도 한식을 만들 줄 알게 되고 이때부터 제사음식을 혼자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주공아파트 16평짜리 집에 사는데 시댁 식구들이 많아서 제사를 모시러 올 때마다 “집이 너무 좁다”고 하셨다. 또 어떤 분들은 “집이 좁다는 이유로 제사 때 안 왔다”고 하셨다. 

이런 말들을 듣고 나서 나는 더 아껴 살아야 더 큰 집으로 이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절약하며 노력한 덕분에 2년후 같은 아파트이지만 23평짜리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런데 작은 어머님이 너무 깔끔한 편이어서 나도 깔끔하게 살려고 애를 무척 많이 썼다. 추석이나 설날, 제삿날 전 3일 동안 집의 구석구석까지 뒤집어가면서 청소를 했다. 
몸살이 날 정도로 대청소를 했다. 반면에 장을 볼 때는 혹시나 뭐하나 빠질까 봐 조마조마하며 늘 장을 보기 며칠 전에 제사에 필요한 음식들을 하나하나씩 꼼꼼히 수첩에 적은 후에 매번 체크해 놓고 장을 봤다. (중략)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국에서 벌써 11년째를 살고 7년 제사를 모셨다. 한국의 낯선 문화를 처음 접하고 새로운 한국생활을 위해 처음 한국 땅을 밟던 그 순간부터 오늘까지 한국생활에 적응하게 해 한숨이라도 쉬지 않고 한국말과 한국문화를 피눈물이 날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올해 한국생활 11년째부터는 나도 나 자신을 위하면서 살아가려고 한다. 
2016년에 갑자기 나는 갑상선이 걸려 지금까지 갑상선 기능이 좋아지는 약을 복용한지 5년째이고 축농증 때문에 몸이 너무 힘들있다. 
그래도 남편이 어린 시절부터 친부모님과 쭉 헤어져 살아왔기 때문에 작은 어머님과 작은 아버님, 고모님들한테 도움을 받아오며 살아왔기에 그동안 내가 남편 대신 이분들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서 뭐든지 시킨 대로 했었다. 

힘들 때도 많았지만 입을 열지 않고 무조건 복종을 했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의 복종은 없을 것이다. 앞으로는 누구한테도 얽매여 살지도 않을 것이고 내가 해 보고 싶은 것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한국에서 한번이라도 나를 위해 살아야겠다. 21세기는 모두가 동등한 시대이며 누구든지 공평한 권리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이다. 
그래서 한국 남편과 결혼한 것은 운명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인연이므로 힘들어도 좌절을 생각한 적이 없었다. 
늘 극복할 방향으로 해결방법만 찾았다. 어려움을 부딪쳐도 불만하지 않고 저절로 받아들였다. 또 한국에 처음 밟았던 걸음부터 오늘까지 이국땅에서 애를 많이 썼다. 항상 최선을 다한 마음에 지금부터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도 동감하고 응원해주시기 바란다. 
오유빈 / 베트남
주최 : 전라남도
주관 : 영광군건강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