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원의 대하소설 - 파시
서주원의 대하소설 - 파시
  • 영광21
  • 승인 2021.08.19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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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11 - 1. 갑신년 중추 칠산바다의 월식 ⑪

해질 무렵, 앙얼은 어젯밤부터 밥 한술 입안에 넣은 적 없어 창자 속 회충이 목을 타고 기어 올라와 입 밖으로 나올 것 같다고 투덜댔다. 
사실 주뱅도 배가 고픈 건 마찬가지다. 어쩌면 앙얼보다 더 배가 고플지 모른다. 
며칠 전, 주뱅은 왕포에서 고깃배 선원 한명을 비수로 살해했다. 그 뒤, 입맛이 뚝 떨어졌다. 어쩌다 먹을거리가 눈에 띄면 앙얼은 걸신들린 사람처럼 덤볐지만 주뱅은 그러지 않았다. 
벌써 여러 날째, 주뱅과 앙얼은 변산반도 야산에서 숨어 지냈다. 깊은 산중의 산길을 오르내리다 감나무나 밤나무가 보이면 두 사람은 걸음을 멈췄다. 떫은 감도, 땅에 떨어져 벌레 먹은 생밤도 가리지 않고 입안에 집어넣었다. 화전민이 산중에 일군 밭이 나오면, 두 사람은 몰래 들어가 농작물을 훔쳐 요기했다. 
산중 민가에 여러 차례 숨어들기도 했다. 민가가 나타나면 숲이나 바위 뒤편에 몸을 숨긴 채 한참 동안 염탐했다. 짖어대는 개가 있는지, 인기척이 있는지 확인한 뒤, 없으면 슬금슬금 숨어 들어가서 집안을 샅샅이 뒤졌다. 부엌이며, 헛간이며, 심지어 안방까지 뒤져 밥이나 식량을 찾았다. 
하지만 매번 허탕이었다.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중추지만 깊은 산중의 민가엔 쉬어빠진 찬밥 한그릇은 커녕 보리쌀 한줌도 없었다. 그만큼 변산반도 산중 사람들의 삶도 팍팍한 모양이었다. 
추석 명절을 전후해 두 사람은 입에 곡기를 대지 못했다. 함부로 움직일 수 없어서다. 명절을 쇤답시고 동네방네 사람들의 왕래가 많다보니 선뜻 나서서 주인 없는 빈집을 찾기 힘들었다.  
어제 점심때였다. 수리봉 중턱의 묘지 앞에서 앙얼은 송편 몇개를 발견했다. 추석날 성묘객들이 남기고 간 모양이었다. 송편 몇개를 허겁지겁 주워 먹은 다음, 앙얼은 묘지 근처 풀숲을 뒤졌다. 찬밥 몇 덩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성묘객들이 고수레한 찬밥 덩어리가 몇군데 흩어져 있었다.

 

며칠을 굶은 터라 앙얼은 흙 묻은 송편인들, 개미가 달라붙은 찬밥인들 가릴 처지가 못 됐다. 앙얼이 닥치는 대로 입안에 찬밥을 밀어 넣고 있는데 주뱅이 묘지 앞으로 다가왔다. 앙얼은 주뱅의 입술에 개미 수십마리가 달라붙은 찬밥 한 덩어리를 들이밀었다. 주뱅은 먹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몸집이 큰 앙얼은 식탐이 많다. 삐쩍 마른 주뱅은 적은 편이다. 주뱅은 하루에 한끼를 먹고도 잘 버틴다. 며칠 동안 곡기를 입에 대지 않더라도 배가 고프다는 하소연을 늘어놓지 않는다. 깊은 산속의 나무 열매나 산나물은 그가 즐기는 군입거리다. 주인이 보이지 않는 밭에서는 고구마나 무도 캐 먹는다. 해삼이나 소라는 주뱅이 갯가에서 즐기는 간식거리다. 
그뿐 아니다. 주뱅은 뭍에서 은신하다 도저히 배고픔을 견딜 수 없으면 지나가는 들쥐나 뱀도 잡아먹는다. 불을 피울 상황이 안되면 들쥐나 뱀을 날것으로 먹곤 하는데, 여태껏 탈이 난 적 없다. 
앙얼은 주뱅의 이런 먹성과 식습관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주뱅이 끼니를 대충 때워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주뱅은 먹을 것을 앞에 두면 주뱅보다 먼저 손이나 젓가락을 내민다. 마주 앉은 밥상머리에서 주뱅이 입맛이 없다며 먼저 숟가락과 젓가락을 내려놓고 일어서도 앙얼은 걱정하지 않는다.
주뱅이 삼대 주린 걸신처럼 개미가 잔뜩 달라붙은 찬밥 덩어리들을 게걸스럽게 입안에 밀어 넣는 사이, 주뱅은 묘지 아래 계곡으로 내려갔다. 찬밥 몇 덩어리를 게눈 감추듯 먹어 치운 앙얼도 그 뒤를 따랐다.
계곡에 발이 닿자마자 앙얼은 바위틈으로 졸졸 흐르는 물을 양손 손바닥으로 모아 연거푸 들이켰다. 송편 몇개에 곁들여 찬밥 몇 덩어리까지 급히 먹어치웠으니 목이 탈만도 했다.
타들어 간 목이 촉촉해질 때까지 계곡의 물을 양껏 마신 뒤, 앙얼은 주뱅이 우두커니 앉아 있는 너른 바위 위에 벌러덩 누웠다. 식곤증이 밀려왔는지 돌베개에 머리가 닿기 무섭게 곯아떨어졌다.
잠시 뒤, 주뱅도 돌베개에 머리를 대고 잠들었다. 두 사람이 눈을 뜬 건 몇 식경 뒤였다. 해가 지고, 휘영청 달이 떠오를 무렵 두 사람은 죽막동 뒷산으로 이동했다.  
두 사람이 수리봉 중턱에서 죽막동 뒷산으로 숨어든 데는 꿍꿍이속이 있었다. 갯가에 묶인 고깃배를 훔쳐 타고 고군산 장자도로 건너갈 참이었다. 장자도의 인적이 드믄 갯가엔 두 사람이 받들어 모시는 해적 수괴가 숨어 있다. (계속)


※ 농업경제신문과 동시 게재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