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최초 신식학교 법성포초 역사 재정립
우리고장 최초 신식학교 법성포초 역사 재정립
  • 영광21
  • 승인 2005.09.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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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로 읽어보는 법성포초등학교 100년사 ①
대부분의 사학자들은 서양의 새로운 문화와 앞선 과학문명이 들어오기 시작했던 갑오경장(1894년) 전후를 우리나라가 개화하기 시작하는 개화기로 보고 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는 새로운 교육제도가 수립되고 상당기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광군지>의 기록을 살펴보면 "우리고장 영광군에서는 갑오개혁기의 소학교령에 의해서는 학교가 설립된 바 없고, 통감시대에 이르러서야 영광과 법성포 두 곳에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영광초등학교의 전신인 사립 광흥학교가 1907년 5월5일, 법성포초등학교의 전신인 법성사립보통학교가 1908년 7월4일에 설립되었고 이 두 학교가 영광군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이었다.(제2장 근대 교육 제1절 개화기 교육)"라고 1971년도에 발간된 전남교육사를 인용해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법성사립보통학교 초기에 이 학교를 다니셨다는 신명희(1901∼1985)선생의 미발간 유고집인 <법포견문기>와 김영남 선생이 집필한 법성향지편찬위원회의 <법성향지>에는 1906년도에 법성사립보통학교가 설립됐다고 기록돼 있고, 1925년 2월28일자 '학부형회 발기' 제하의 동아일보에는 개교한지 18년이 됐다고 했으니 1907년에 설립된 학교로 소개돼 있다.

멀지 않아 100년이 된다는 법성포초등학교의 학교사(學校史)는 이 같이 이 학교의 개교 100년이 되는 해가 <법성향지>의 기록대로라면 내년인 2006년이 되고, <영광군지>의 기록대로라면 앞으로 3년 후인 2008년이 되며 동아일보의 기사대로라면 2007년이 된다.

이 학교는 재작년까지만 해도 일제 강점기였던 1930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교육대관>의 기록대로 학교 당국의 홈페이지에 '1916년 10월13일에 개교되었다'라고 기록돼 있었고 이날을 개교일로 기념한 학교이며, 1992년도 개정판인 <법성향지>의 지적대로 졸업생들의 졸업기수가 사실과 다른 학교이다.

그래서 지역의 뜻이 있는 동문들과 재경 향우회 그리고 학교 당국(당시 교장 임종식 선생님)에서 2003년 10월4일 법성포초등학교 총동문회 날에 맞춰 역사관을 개관하면서 설립연도를 정정해 지금은 이 학교 홈페이지에 '1908년 7월4일 사립보통학교 개교'로 기록돼 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이 학교가 두 차례나 큰불이 나 1945년 8·15 광복 이전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수집된 일제 강점기의 '법성포초등학교' 학교사에 대한 문헌은 <법성향지>나 <영광군지>에서 인용하고 있는 1930년 발간한 조선총독부의 <조선교육대관>과 1971년 발간된 <전남교육사> 그리고 동아일보 등 당시의 일간지 기록과 당시에 사셨던 신명희 선생의 <법포견문기>가 전부이며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대부분의 학교사 모두가 구전(口傳)이나 옛 어른들의 증언이 상당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법성사립보통학교 시대 - 4년간의 동조루시대

우선 1988년 초판 발간된 <법성향지>(편찬위원장 임선혁, 집필자 김영남)와 1992년 발간된 개정판 <법성향지>(편찬위원장 홍성수, 집필자 김영남) 그리고 당시 이 학교를 다니셨다는 신명희 선생(법성중학교 전신인 법성수산중학교 초대 교장 역임)의 육필 원고인 <법포견문기>(1985년 추정)를 살펴보면 "1906년 사립법성보통학교를 설립하고 동조루(董漕樓)를 교사로 정한 후…이택섭(李澤燮) 등 여러 사람이 발기(發起)… 서울에서 최한주(崔漢柱) 교사를 초빙하고…(후략)"라고 기록돼 있다. 1906년 학교가 설립됐다면 법성사립보통학교는 영광군 최초의 신식학교가 된다.

조선시대 법성포에는 전라도 지역의 최대 조창(漕倉)이 있었던 곳이다. 전라도 지역의 각 고을(군·현)에서 거둬들였던 세미(稅米)는 일정한 검사과정을 거쳐 수도 한양으로 운송됐는데, 각 고을에서 수납했던 그 세미를 검사했던 곳이 지금의 법성면 진내리 74번지 일대의 조대(租臺)마당에 위치했던 동조루다.

이 건물의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법성진성(옹성)의 축성 연대인 1514년(중종 9년)부터 1530년(중종 25년) 사이에 건립된 건물로 추정되며 조창이 혁파(革罷)됐던 1895년(고종 32년) 이후까지 남아 있었으나 목포에 사는 어느 재력가가 헐어 배로 실어갔다고 전해지는 건물이다. 바로 이 동조루와 그 옆에 자리했던 관아의 객사건물이 개화기의 소위 신식학교라 불렀던 법성사립보통학교 자리다. 그래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곳과 옛날 형방청(刑房廳)이 있었던 청년회관터 일대를 지금도 '핵고당'이라 부르고 있다.

우리고장 최초 신식학교 세운 광산이씨

<법성향지>와 <영광군지>에는 이 학교를 설립한 이가 '이장섭, 이택섭 두 형제분이다'라고 기록돼 있는 반면 당시 이 학교를 다니셨다는 신명희 선생의 <법호견문기>에는 '이택섭 등 수인(數人)이 발기하였다'라고 기록돼 있고 학교를 발기했던 여러 사람이 누구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장섭, 이택섭 - 광산인(光山人) 상서공 순백의 후손 - 두 형제분은 지금 서울에 살고 있는 법성포초교 30회 이기방님의 할아버지이고, 법성포초교 35회 이충기, 법성 금성당 금은방 이기운, 법성초교 44회 이기욱님들이 모두 이 가문이다.

<법성향지>와 <법호견문기>에는 법성사립보통학교의 개교과정이 '처음에 이장섭, 이택섭 두 형제가 사재를 털어 '조대마당'에다 학교를 개설한 당시에 신학문을 가르쳤으나 개설인가나 학제 따위가 분명치 않은 서당과 같은 형식으로 운영된 듯 싶다'라고 기록돼 있는데 이 학교의 개설 당시인 1906년은 조선교육령이 시행되기 전으로 관계당국의 개설인가나 학제 등이 분명하지 않았던 우리나라 교육사의 과도기에 해당되는 시대이다.

<영광군지>의 기록에서 영광읍의 경우를 살펴보면 이 학교 보다 1년 뒤인 1907년 도동리 노인당 자리에 '한일학원'이 설립돼 약 6개월 정도 운영하다 문을 닫았고, 1908년에 향교의 명륜당에 '광흥학교'가 설립돼 2년간 운영되다가 폐교됐는데

당시 광흥학교의 학제가 1년간의 속성과정으로 35명의 제1회 졸업생을 배출(사진에서 보듯 광흥학교는 제1회 졸업생들의 졸업 기념사진이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음에 비추어 당시 법성포의 발전상으로 보아 법성사립보통학교의 졸업사진도 소장하고 있는 분이 있을 법한데 현재까지 전해지지 않고 있다)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법성사립보통학교의 학제도 이와 유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