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원의 대하소설 파시
서주원의 대하소설 파시
  • 영광21
  • 승인 2022.01.20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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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 NO. 17 - 1. 갑신년 중추 칠산바다의 월식

 

이태 전 이맘때 어느 날이었다. 앙얼과 격포파 해적 두목은 내변산 울금바위 원효방에서 며칠간 함께 은신한 적 있다. 
작년 춘삼월 비안도에서 세곡선을 털다 객사한 격포파 막둥이의 소개로 앙얼은 격포파 두목과 첫 인연을 맺었고 한때 가깝게 지냈다.

내변산엔 개암사라는 백제 고찰이 있다. 선운사 말사인 개암사는 백제의 승려 묘련이 창건했다. 
개암사 뒷산 능가산 정상엔 울금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다. 깎아지른 절벽이라 호랑이도 감히 오를 수 없는 두 쌍의 봉우리는 거대하고 기이하다. 

우금바위라고도 불리는 울금바위엔 3개의 동굴이 있다. 복신굴과 베틀굴, 그리고 원효방이다. 복신굴과 베틀굴은 개암사에서 보았을 때, 왼편 봉우리 아래에 있고, 원효방은 오른편 봉우리에 있다. 
복신福信은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사촌동생으로 장수였다.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했을 때 항쟁했던 복신은 백제가 망한 뒤 주류성, 곧 울금바위를 축으로 한 우금산성에서 백제부흥운동을 펼쳤다. 나라를 잃은 백제 유민들은 주류성에서 약 3년간 왕자 부여풍을 옹립해 백제 재건을 도모했다.

백제 부흥의 마지막 목소리가 골골에 서린 주류성은 동진강과 서해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다. 
변산반도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천혜의 요새다. 백제 유민들은 신라와 당나라가 점령한 사비성에서 멀리 떨어진 주류성에서 망국의 설움을 곱씹으며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으려 몸부림쳤다. 
주류성은 서해를 끼고 있어 언제든지 배를 타고 금강을 거슬러 올라가 사비성을 공략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그런데다 동진강 유역에 발달한 너른 평야는 군량미 조달이 수월했다. 
그래서 백제 유민들은 주류성을 백제 부흥의 본거지로 삼았다. 그런 역사에 근거해 주류성을 백제의 마지막 수도라고 칭하는 이도 있다. 

복신굴 근처엔 원효대사가 머물렀다는 원효방이 있다. 서너평 남짓한 굴과 한평 남짓한 굴이 나란히 있다. 원효방 굴 한쪽 구석엔 작은 웅덩이가 있다. 바위틈에서 스며 나온 물이 겨우 한 움큼 고여있다. 
전해 오는 바에 따르면, 원효대사가 이 원효방에 머물 적, 차를 달여 마실 물이 없었는데 어느 날 바위틈에서 물이 새어 나왔다. 매우 달아서 마치 젖과 같은 물맛이 났다. 원효방 옹달샘을 ‘다천茶泉’ 혹은 ‘유천乳泉’이라 부르는 연유다.  

이 원효방에서 격포파 두목은 앙얼에게 황당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나주목 장산도 출신 해적들이 주축을 이룬 장산도파 두목이 수성할미 화상을 훔쳐서 건네주면 거금을 주겠다고 제안했다는데, 격포파가 훔친 수성할미 화상은 장산도를 수시로 들락거리는 왜구들에겐 전해 질 것이라고 했다. 물론 거액이 오고 가는 장물 거래였다. 

앙얼은 수성할미가 누군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데다 왜구들이 무슨 목적으로 수성할미 화상을 사겠다고 나섰는지 따져 볼 필요도 없어 격포파 두목의 얘기를 귀여겨듣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런 말을 귀띔하는 격포파 두목의 태도는 무척 진지했고, 홀로 수성당으로 수성할미 화상을 훔치러 나서면서 부리는 그의 결기는 비장했다.

앙얼은 그 뒤 소문으로 들었다. 격포파 두목은 수성할미 화상을 훔치던 날 오밤중에 적벽강에서 호랑이한테 물려 죽었고, 수성할미 화상을 은밀하게 건네받아 장산도로 출항한 해적선은 위도 임수도 근해에서 침몰했는데, 이 사고로 해적선에 타고 있던 장산도파 두목을 포함해 해적 일곱명이 익사했단다. 

훗날 소문으로 들은 얘기라 앙얼은 격포파 두목이 정말로 수성할미 화상을 훔친 뒤 호랑이한테 물려 죽었는지, 또 수성할미 화상을 왜구한테 넘기려 장산도로 향하던 해적선이 정말로 침몰했는지, 그  사실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다만, 울금바위 원효방에서 수성당으로 수성할미 화상을 훔치러 간 격포파 두목의 얼굴을 그 뒤로 본 적 없고, 수성할미 화상이 도난당했다고 격포진 관아에서 대대적인 조사를 벌였다는 소식을 훗날 풍문으로 들었다.

아무튼 그 무렵부터 앙얼은 수성할미 얘기만 나오면 몸을 벌벌 떤다. 그뿐 아니다. 수성당과 수성할미 얘기를 입밖으로 꺼내려 할 때마다 말더듬증이 도진다.  
주뱅이 음식을 훔치러 수성당 당집 안으로 들어간 뒤, 수성당 앞뜰에서 한참 동안 몸을 벌벌 떨고 있던 앙얼이 달빛이 흘러든 시누대 대숲을 겁에 질린 토끼의 눈으로 둘러본다. 거무충충한 대숲이 음산하게 느껴져서다.

‘호오 호랑이가 나아 나타난 거 아 아닐꺼나? 아아 아까는 호랭이 우으 울음 소오 소리같은 이이 이상헌 소리가 들렸고, 이이 인자는 여어 여그 대숲서 사아 사람인지 지임 짐승인지 바알 발자국 소리도 드으 들리는디…’

헛것이 보이는 건지, 환청이 들리는 건지, 앙얼은 이렇게 속으로 
뇌까리며 괴춤에서 비수를 꺼내 오른손에 꼭 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