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악한 학교재정에도 청·장년층까지 향학열 뜨거워
열악한 학교재정에도 청·장년층까지 향학열 뜨거워
  • 영광21
  • 승인 2005.10.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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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로 읽어보는 법성포초등학교 100년사 ②
흔히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라고 한다. 미래로 가는 길은 오히려 오래된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도 있다. 지난 우리고장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것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가늠하며 예측하기 위해 선현들이 남겨주신 향토사는 소중한 우리들의 자산이다.

이제 어렵게 이어오고 있는 우리 선현들의 기록에 더 채울 부분이 있다면 지금부터 조금씩 채우고, 다듬고 그리고 바로 써서 선현들이 물려주신 소중한 기록들과 함께 우리고장 법성의 정사로 후세에 남기는 전통을 우리 모두 이어 가자.

이 글은 법성포초등학교 학교사(學校史) 뿐만 아니라 법성향토사 전체를 공론화하기 위해 보다 정확한 향토사를 기록하기 위한 On-Line 계획의 일환으로 시도된 글이다. 따라서 이 글에 미흡한 부분이나 사실과 다른 부분, 보완이 필요한 부분과 반론 등은 이 글을 읽는 이 누구나 개진하실 수 있다.

여러분들의 소중한 의견과 학교사의 기록에 소중한 사료나 문헌이 있으신 분은 학교 또는 운영위원회(위원장 정명수)로 연락해 주기 바란다. 개교 100주년을 즈음해 학교 운영위원회에서는 법경헌에 자료를 의뢰, 기록을 정리해서 게재하게 됐다. / 편집자 주


법성사립보통학교의 개교 당시 교사진도 <법성향지>와 <법호견문기>에 다음과 같이 소개돼 있다. '초대 교장으로는 서울에서 최한주를 모셔 왔는데 주로 이 분이 신학문분야인 지리, 역사, 이과(과학), 산학통론(수학), 창가 등을 담당했다. 체조(체육)교사로는 수군(水軍)의 훈련교관으로 있던 강치선(별명 강서울)이다.

수군진영이 혁파되기 전부터 서울에서 부임해 온 군관(장교)인지, 한말의 군대 해산령으로 인해 구식 군대가 일본군과 일대 반격전을 벌이고 흩어져 각 지방으로 내려가 의병봉기에 가담했을 때 이 고장으로 내려왔는지는 분명치가 않으나 이 분은 진내리 청년회관 위쪽에서 살았고, 1935년경까지 살아 계셨다.

키는 컸으며 몸이 깡마르고, 두 눈이 횅하니 들어갔으나 광채가 났다. 그러나 매우 인자한 성품이어서 어린이들을 무척 사랑하셨다. 어린 눈에도 무척 생활이 곤궁한 눈치였다. 용덕리 신계동 출신 유학자 소남(小南) 이원백이 서화와 한문교사로 초빙됐는데 이 분의 후임으로 김학서당의 김봉재가 취임했었다.

위 글에서 소개되고 있는 김학서당의 김봉재님과 전간제(田艮齊)(1841∼1922) 선생의 당시로서는 유명했다는 초달(楚撻)의 일화도 <법성향지>와 <법호견문기>에 다음과 같이 소개돼 있다.

제자를 회초리로 내려친 전우 선생
『김봉재 - 김정환의 조부 : 전형적인 주자학의 신봉자였다. 국치 후 시류에 따라 일시 보통학교 한문선생으로 출강하고 있었는데, 이 때 관직을 버리고 향리인 부안에서 은거하던 간제 선생이 법성에 들려 제자 김봉재를 찾았으나 그가 출타 중이었다.

행선을 물으니 훈도가 되어 직장에 갔다하지 않는가? 이 때 김봉재는 일본사람들이 설립한 보통학교에서 한문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간제 선생은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어서 봉재를 데려다 내 앞에 꿇리도록 하라!'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윽고 봉재는 간제 선생 앞에 꿇어앉았다. '네 이놈! 봉재야! 네가 소위 글을 배운 선비의 몸으로 나라의 비운을 어찌 티끌만치도 생각지 못하느냐? 네가 지금 무슨 할 짓이 없어 왜놈의 녹으로 더럽게 창자를 채우고 있느냐? 내가 너를 그렇게 가르쳤더냐!'하고 회초리를 한다발 꺾어 오라 하여 다 큰 어른의 종아리를 걷게 하고 호되게 매질을 하였다.』

담양전씨인 간제 전 우는 13세때 사서삼경을 읽고 20세 안에 초과, 중과 등 양과에 오른 수재였고. 만년에는 부안의 계화도에 은거하며, 많은 후진들을 길렀으며, 우리나라 500년 유문의 도통(道統)을 계승한 한말에 성리학의 대가였던 분이다.

법성사립보통학교 1회 졸업생들
법성사립보통학교의 초창기 입학생으로는 항일 독립투쟁으로 일생을 바친 야인 고경진님을 필두로 나계형, 나질순(6·25 동란 때 법성면장 역임, 법성리 나연섭님의 할아버지), 법경 김장근(법성중의 전신인 법성실업중의 재단이었던 양영학원 이사장 역임,

재경향우회 김효진, 단오보존회 사무국장 김기진님의 할아버지), 김돈하·김규하(진내리 천일약국 김관중님의 아버지) 형제, 임응섭, 조덕연, 나상희, 김갑선, 배상진(인의당약국 배정백님의 작은 할아버지), 시은 신복섭(인천에서 신명약국을 운영하고 계시는 신의명, 법성초교 40회 신금수님의 할아버지), 이경섭

그리고 신명희(8·15 광복후 법성중의 전신인 법성수산중학교 초대 교장 역임) 등이었다고 하는데 학적이나 사진 등 이러한 사실들을 입증할 자료는 없고 당시에 이 학교를 다니셨다는 어르신들의 증언으로 <법성향지>에 수록된 기록이다.

이 학교는 후에 6∼7세 아동으로부터 청·장년까지 100여명에 달하여 갑 을 병 정 4개반으로 편성해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초대 교장이셨던 최한주님이 약 2년여 동안 재임하시다가 서울로 가시고, 1908년 제2대 교장으로 평양의 대성학원 출신이신 계희선님을 야인 고경진 선생이 모셔 왔는데 당시에는 학비도 무료였고, 학용품도 무료로 제공했다고 한다.

학생수는 늘어나고 학교의 재정수입은 열악하니 당시의 학교 운영이 아주 어려웠던 모양이다. 당시 이 학교를 다니셨다는 신명희 선생은 <법포견문기>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2년후 최 교장의 후임으로 평양에 계희선 교사가 부임하고, 갑(甲)반에 고경진, 나계형, 이경섭, 조덕연, 나상희 등의 우수한 접장(接長)들이 있어 조교사역(助敎師役)을 하고 이사장도 장대호 면장(주 : 당시 법성면장 - 진내리 장기주님의 아버지)이

취임해 재정을 조달했으나 곤란이 수반되므로 계 선생도 가고, 고경진, 나계형 등이 전력으로 (학교를)유지했는데, 고경진은 불고가사(不顧家事)하고 학교에 전념하니, 가세는 점쇠하고 영락(零落)하여, 문자 그대로 가옥이 도괴(倒壞)됐다.'
법경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