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영광상사화예술제 글짓기 대상 중·고등부 대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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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광21
  • 승인 2023.11.10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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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하고 빛나는 나의 가족
노주은 / 백수중 2학년

어릴 적부터 나와 언니를 키워주신 분은 나의 할머니이다. 그때 당시 우리 할머니 연세는 62세, 벌써 10여년이나 지났으니 지금 할머니의 연세는 72세다. 
우리 할머니는 젊은 시절부터 지금은 흔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 당시에는 절대 흔하지 않았던 직업을 가지셨었다. 식당에서 밥을 하는 요리사와 개인택시 기사이다. 지금은 너무나 흔한 직업이지만 할머니께서 젊었을 적인 시절에는 여자 요리사와 여자 개인택시 기사는 흔한 직업이 아니었다고 가끔 이야기하셨다. 
그 당시에는 여자의 사회생활, 직업을 갖는 일이 흔하지 않았고 더욱이 개인택시 기사는 더 흔하지 않았었다. 할머니께서 개인택시 운전을 하시면서 타는 손님마다 “여자 개인택시 기사는 처음보네요”라는 말을 했었다고 했다. 
할머니께서는 그 시절을 이야기할 때마다 옛 생각을 떠올리려는 듯 눈을 반쯤은 찌푸리고 먼 곳을 응시하셨다. 
그런데 나는 그때마다 우리 할머니께서 원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마냥 우리를 위해 희생하고 우리 이야기만 들어주기 바쁘셨던 우리 할머니는 사실 굉장히 진취적이고 힘이 넘치는 대한민국의 여성이었던 건 아닐까. 그런 할머니께서 나와 언니를 위해 자신의 자부심과 같았던 개인택시를 포기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할머니의 삶의 방향 전체를 바꾸는 일이었을 테니 말이다.
나의 옛 이야기는 종종 친척들을 통해 들어왔다. 내가 3~4살 무렵에 엄마가 장애가 있었다고 했다. 하루 종일 게임에만 빠져있고 나와 언니에게 밥을 안 챙겨주는 바람에 내가 방충망이 늘어날 정도로 밖에다 고개를 내밀고 소리를 질러댔다고 한다. 
어린아이의 그 행동은 아마 생존의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이를 밖에서 본 할머니께서는 도저히 우리들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고 하셨다. 
‘어린 니네가 무슨 죄냐’며 할머니는 직장을 포기하셨다.
이때 할머니의 그 소중한 개인택시와 멋지게 살아내 왔던 당신의 인생을 포기한 것이다. 그리고 보란듯이 나와 언니를 키워내셨다. 4, 5살이 되었을 때는 언니와 나도 어느 정도 자라서 엄마께서 보살펴 주시기도 하였지만 그때도 할머니의 보살핌이 매우 컸다고 들었다. 
이렇게 성장해 초등학교 입학을 하고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듣고 싶지 않은 엄마의 소식을 들었다. 너무 어린나이에 엄마의 그런 행동이 뭘 의미하는지 놀랐다. 하지만 엄마와 아빠가 다투는 모든 이야기를 들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엄마가 한 행동이 무슨 의미이고 우리 가족에게 어떤 상처를 안겨주었는지 차차 알게 되었다. 
이렇게 아빠와 엄마는 크게 다투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 당시에도 손가락 열개로 부족할 만큼의 수였다. 그 일이 있을 때마다 언니는 항상 눈물을 쏟아내며 목이 쉴 때까지 소리를 질렀고 나는 울다 지쳐 멍하니 허공을 보는 일이 많았다. 

항상 이럴 때마다 옆에 계셔주셨던 분이 할머니였다. “괜찮다. 다 괜찮다. 할머니가 옆에 있다. 다 괜찮다”라며 조용히 안아주시던 분이 할머니였다. 그거면 됐었다. 그 어떤 위로의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항상 당신이 옆에 있으니, 다 괜찮다던 할머니의 존재감 자체가 나에게 무엇보다 큰 위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할머니 몰래 등지고 숨죽여 울곤 했다. 
‘할머니가 없어지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나를 이토록 따뜻하게 안아주고 안정감을 갖게 해주던 할머니 자체가 나에게는 하나의 세상이었기 때문에 가끔은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찾아올 정도였다. 이후 엄마와 아빠는 끝내 이혼을 하셨다. 그렇게 내가 애증하던 엄마는 떠나버렸다.
언제부턴가 집에 오면 엄마가 없었다. 엄마가 없으면 다툼도 아픔도 없을 것 같았는데 집이 텅빈 느낌이었다. 그리고 일손이 줄어 할머니께서는 더 힘들어하셨다. 이렇게 우리는 각자의 힘듦을 가지고 어떻게든 살아내려 애섰었다. 그래도 할머니께서는 힘든 와중에 꾸준히 언니와 나를 위해 주셨다. 우리를 항상 안쓰럽게 여겨주셨다.
엄마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게 하려는 듯이 더 많이 표현해 주시고 더 깊이 사랑해 주셨다. 가끔은 ‘할머니의 인생에 나와 언니 말고 무엇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항상 우리를 우선으로 여겨주셨다. 
학교의 각종 작은 행사까지도 한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해 주셨다. 
내가 아파서 병원에 갈 일이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지 한 걸음에 나타나 주셨다. 내가 학교에서 어디 체험이라도 가게 되면 새벽부터 일어나 친구들과 함께 먹을 과일, 도시락을 지금도 챙겨주신다. 내 주위에서 이렇게까지 챙겨오는 애들은 없는데 말이다.

나에게 이토록 희생해 주시는 우리 할머니를 위해서 더 열심히 노력하고 더 자주 표현하지는 못할망정 나는 사춘기를 핑계로 할머니에게 틱틱대곤 한다. 마음은 그게 아닌데 왠지모를 어색함과 사랑과 미안함과 감사함이 이리저리 뒤섞여 마치 고장난 기계처럼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말이 나와버린다. 하지만 사춘기가 나의 마음을 변화시킨 것은 아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는 한결 같이 할머니를 사랑하고 있다. 항상 애타게 부르고 있다.
이런 마음을 직접 표현하지는 못해서 나에겐 습관이 하나 생겼다.
할머니와 같이 시간이 있을 때 가끔 할머니를 보며 몰래 사진으로 찍는 것이다. 동영상으로 남겨놓기도 한다. 이것은 사실 우리 할머니는 모르는 1급 비밀이다. 절대 상상도 못하실 일이다. 
왜냐하면 ‘이 녀석이 또 폰이나 보고 있겠거니’ 생각하고 계실 때 나는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사진에 담는 이이러니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가 있다.
잠이 오지 않는 어느 날 밤에 문득 생각하게 됐다. 나중에 내가 커서 무엇이 될지, 어떤 어른이 될지 그리고 자연스럽게 직업을 갖게 되면 가장 먼저 효도할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상상의 모습이 희미하고 확신이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직업을 갖고 효도할 때쯤의 할머니 연세가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이상한 밤이었다. 이제 내가 커서 성공해서 할머니께서 주신 사랑을 다시 돌려주며 살 행복한 나날만 그리면 되는데 왜 이렇게 시간이 모자란 걸까.
그렇게 조금은 슬퍼지는 밤을 보내고 난 후에 생긴 습관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상상으로만 얼굴을 떠올리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고 싶어도 못볼 지금의 일생의 모습을 최대한 많이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일하시다가 주말 낮에 거실에서 햇살을 받으면 잠시 주무시는 모습, 나라면 절대 못하지 싶은 일들을 웃으며 묵묵하게 해내시는 모습, 우리를 위해서 정성스럽게 본 장으로 언니와 내가 각자 좋아하는 반찬을 꼭 1개씩은 상에 올려주시는 모습들, 거르지 않고 최대한 많이 그냥 사진에 담는다.
어떤 때는 할머니께서 잘 사용하지 않는 스마트폰으로 문자를 보내주신다. 
메세지는 대부분 걱정해 주시는 내용이 수두룩하고 마지막 끝말은 항상 한결같이 ‘사랑해’이다. 
이토록 나를 사랑해주고 안정감을 주고 나의 따뜻한 세상이 되어주는 사람이 나의 가족 구성원이니 얼마나 눈부시고 찬란한 일인가. 그래서 나는 내가 눈부시고, 찬란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가족’의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든든한 아빠, 다정한 엄마와 형제, 자매의 가족 구성원을 그릴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족’을 그리라고 하면 흰 도화지에 눈부신 가을 햇살을 받고 있는 찬란한 해바라기의 모습을 그릴 것이다. 나에게 가족은 그런 것이다.
구성원의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그 무엇보다 눈부시고 찬란하게 해주는 무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