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영광상사화예술제 글짓기 중·고등부 입상작 금
2023영광상사화예술제 글짓기 중·고등부 입상작 금
  • 영광21
  • 승인 2023.11.17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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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다행이야. 너희와 함께라서
차승희 / 염산중 1학년

학교는 항상 시끌벅적하다. 친구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지나가시는 선생님들의 말소리. 학교는 공부를 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나는 친구들 또는 선생님을 만나 좋은 관계를 맺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 가는 것이 즐겁다.
생일인 친구에게 생일축하를 해주는 때, 친구들과 둘러 앉아 점심을 먹을 때, 음악시간에 신나는 목소리로 다 함께 노래를 부를 때 난 그런 순간순간들을 학교를 통해 경험해보아서 값진 추억들을 하나씩 쌓아가고 있다.
도시 친구들은 느끼지 못할 우리만의 경험들. 봄에는 서로의 집 모내기로 안부를 묻고, 여름에는 갑자기 내리는 비에 우산 없이 달려도 보고, 가을에는 다 익어가는 대추를 따서 맛보기도 하고, 겨울에는 뒷산에서 썰매를 타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는 자연과 함께 사계절을 보내며 성장해 간다.
30년 뒤에 정치가라는 멋진 꿈을 이루게 될 소연이와 맛있는 빵을 파는 멋진 제과제방사가 될 지연이 그리고 실감나는 소설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멋진 소설가가 될 윤진이, 여전히 투닥투닥 하고 있을 동혁이와 현승이, 제2의 푸바오 엄마가 되어 있을 연주, CEO가 되어 있을 나까지….
30년 뒤 우리들의 삶도 여전한 행복으로 가득하길 바란다.


은상
우리 학교의 추억 열쇠, 상사화
주지영 / 백수중 3학년

사람은 누구나 오래 기억하고 싶은 추억이 있다. 누군가는 산 정상까지 포기하지 않고 올라갔던 자신의 모습과 그때의 풍경을 기억하고 싶을 것이다. 누군가는 가족과 함께 눈 덮인 운동장에서 뛰어놀며 큰 소리로 웃고 떠들었던 기억을 추억하고 싶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자신이 준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친구의 얼굴을 기억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비록 아직 16살 밖에 되지 않았고 세상에는 나보다 많은 추억거리가 있는 사람이 수두룩하겠지만 나도 나만의 간직하고 싶은 소중한 추억이 있다. 그건 바로 우리 학교이다. 나는 올해 3학년이고 졸업까지 4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3년 동안 나는 혼자서 학교를 다녔다. 왜냐하면 우리 학년에는 1명인 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다른 학년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뛰어놀며 단체 게임을 하는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때로는 단체 사진 찍을 때 나와 담임 선생님 둘이서만 찍는 사진이 허전하게 느껴지는 순간도  많았다. 한편으로는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너네라도 다 같이 추억거리를 만들 수 있어서 다행이야’ 싶었다. 그래서 나는 알게 모르게 추억거리가 많은 중학교 생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는 이렇게 졸업하지만 우리 후배들은 나보다 더 많이, 더 즐거운 추억거리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학생회장으로 출마했을 때 이색적인 공약을 내세웠는지도 모르겠다. 
백수의 겨울은 참 춥고 무겁다. 매서운 눈바람이 겨울의 추위를 더욱 춥게, 한없이 쌓이고 쌓이는 눈이 백수의 모든 것을 무겁게 한다. 작년의 겨울도 그랬다. 그리고 내가 학생회장으로 출마했던 그날도 매우 춥고 눈이 내렸다. 어차피 3학년도 나뿐이라 무조건 당선인데도 후배들 앞에서 회장으로서 공약을 말한다는 것은 꾀나 어색하고 부담스러웠다. 
대부분 다른 학교의 학생들은 회장, 부회장으로 나와서 공약을 내세울 때에 학교에 없는 시설을 설치해준다든지, 체육복을 더 제작한다든지 등의 학생들의 편리한 생활을 위한 공약을 내세운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추억이 있는 학교 만들기’를 내세웠다.
내가 사랑하는 학교의 후배들이 나보다 많은 추억거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공약의 구체적인 내용에는 ‘언제나 찾아와도 있는 나만의 꽃과 나무 심기’가 있었다. 자신이 직접 꽃과 나무를 심어놓으면 나중에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어른이 되어서도 우리 학교를 찾아왔을 때 운동장의 수많은 식물들 중에서도 자신의 것을 찾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중학교 생활을 떠올릴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지금의 시간을, 우리의 학교를 추억할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하면서도 다행히 나는 당선되었다. 우리 학교의 학생회장이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다음해 봄이 되어서 이곳저곳에서 꽃이 피어나는데 내 마음 속에서도 공약에 대한 걱정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 
내가 당장 어디에서 꽃과 나무를 가지고 와서 심을 것인가 고민되어서 국어선생님께 여쭤보았다.
“선생님, 저 지난번에 공약 발표했잖아요. 들으셨어요?”
“응, 들었지. 멋지더라. 칫솔 소독기 설치나 용품 비치보다는 훨씬 근사한 공약이었어.”
“네. 그런데…. 어떻게 심죠? 꽃과 나무를요.”
“음…”
선생님께서도 당황하신 모양이었다. 너무 중요한 내용인데 어떻게 갑자기 대책도 없이 물었으니 말이다. 
“아, 지영아, 너 선생님한테 조만간 굉장히 고마워할 일이 있을거야. 내가 그 해결책을 찾아줄게.”
“선생님이요? 어떻게요?”
선생님께서는 무엇이 그리도 즐거우신지, 굉장히 재밌는 책이라도 찾아낸 듯이 눈을 반짝이며 걸어가셨다. 뒷모습이 매우 가벼워 보였다.
그리고 며칠 뒤 갑자기 학교에서 상사화 심기를 한다 했다. 한여름에 이토록 많은 상사화 구근을 심어야 한다고 하니 막막했다. 그런데 이때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국어선생님의 경쾌한 뒷모습이 떠올랐다. ‘아, 나의 공약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막막하기만 했던 상사화 심기가 즐겁게 느껴졌다. 
가장 먼저 우리가 흔히 아는 꽃무릇이라는 빨간 상사화를 심었다. 영광에 살면서도 피어난 상사화만 봤지 상사화 구근은 처음 보고 만져보았다. 상사화를 씨로 심는 줄 알았는데 마치 마늘 모양의 구근을 호미로 땅을 파서 심어야 한다고 하셨다. 처음에는 땅을 파서 심고, 흙을 덮기만 하면 되니까 어렵지 않게 느껴졌는데 시간이 계속 되면 될수록 덥고 힘들었다. 
나도, 후배도, 선생님께서도 더위 속에서 녹아갈 것만 같았다. 그때 저 멀리서 수학선생님께서 간식을 가지고 오셨다. 시원한 수박과 얼음이 동동 띄워진 미숫가루였다. 원래 미숫가루를 잘 안먹는데 그날 처음으로 미숫가루의 진정한 맛을 보게 되었다. 이렇게 다 같이 더위를 식히고 상사화 심기는 다시 시작되었다. 
오후가 되어서 우리는 꽃무릇을 다 심고,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다양한 종류의 상사화를 심었다. 분홍 상사화, 진노랑 상사화, 백양 상사화 등 각종 상사화들을 심고 그곳에 저녁에도 볼 수 있도록 태양광 전등을 설치하는 것까지 마무리하였다. 이렇게 우리들의 상사화 꽃밭은 완성되었다.
이렇게 우리는 다같이 학교에서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었다. 지금은 9월, 벌써 달이 바뀌고 계절도 바뀌었다. 무더웠던 더위는 지나가고 낯선 귀뚜라미의 소리가 밤에 들려온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시원한 바람도 반갑다. 
하지만 이보다 더 반가운 것이 있다. 바로 우리가 심었던 다양한 색의 상사화들이다. 언제부턴가 천천히 대가 올라오더니 어느 순간에 꽃을 피워냈다. 그리고 여름에 상사화를 심던 나와 동생들의 추억도 피어났다. 참 힘들었지. 이 상사화가 내년에 내가 졸업하고 찾아와도, 어른이 되어 찾아와도 이때쯤엔 항상 피어있겠지.
우리가 힘들게 심었던 나의 상사화, 다은이의 상사화, 현주의 상사화, 우리들의 상사화는 우리가 백수중학교를 떠나서도 항상 이 계절이 되면 피어날 것이다. 우리는 떠났어도 우리가 심은 상사화는 항상 우리 학교를 지키며 이 계절이 되면 각자의 색깔로 피어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학교에 피어난 상사화를 보며 나처럼, 올해 여름에 다 같이 상사화를 심던 추억을 떠올리고, 우리가 이 학교에서 보냈던 수많은 시간들을 떠올릴 것이다. 
같이 텃밭에서 상추를 뜯었던 일, 추수 행사를 하며 군고구마를 구워 먹었던 일, 야영 수련활동에서 월출산 정상에서 추억들을 떠올릴 것이다. 이렇게 우리들에게 우리의 학교는 누구나가 살면서 오래토록 간직하고 싶은 하나의 추억이 될 것이다. 

 

동상

5남매의 첫째가 말한다. 동생 더 낳아주세요.
오현주 / 백수중 2학년

뉴스에서 잊을만하면 한번씩 나오는 소식이 있다. “올해 출생률이 또 최하를 기록했습니다. 지난 1분기에 이어….”
내가 기억하는 범위에서 뉴스는 항상 출생률이 최하를 찍었다는 소식만 들려줬다. 가장 최근에 들었던 뉴스는 가구당 0.7명 즉, 1명이 안된다는 통계수치와 함께 저조한 출생률은 앞으로 대한민국에 치명적인 문제가 된다는 전문가의 근심 가득한 인터뷰 내용이었다. 
뉴스를 들으며 우리 가족은 거실에 앉아서 과일을 먹고 있었다. 아빠, 엄마, 나, 동생, 동생, 동생…. 나의 가족은 나까지 포함해 5남매이다. 
5남매 중에서 나는 첫째이다. 5남매의 첫째로서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는 “첫째라서 힘들겠다.” “얘가 동생이니? 얘도 동생이니? 얘도?” “대가족이라서 좋으면서도 장녀라서 힘들겠다.”라는 우려와 걱정, 신기함이 섞인 질문들이다. 그 질문들에 대해 나는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다. 나는 첫째로 태어나서 행복하다고.
왜냐하면 동생들에게는 없는 시기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와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잠시지만 외동딸로 살기도 해봤다. 좋았다.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든 사랑을 독차지했다. 내가 가기만 하면 항상 귀한 손님이라도 온 듯이 가장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주셨다. 어떤 말과 어떤 행동도 외동딸의 시기에는 용인되었다. 물론 동생들이 태어나면서 이제는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옛날의 추억이지만 동생들에 비하면 나는 이런 시기라도 있었으니 비교적 행복한 편인 것이다. 
또한 우리 부모님은 첫째인 내가 학업이나 다른 일로 바쁠 땐 나에게 무언가를 시키거나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첫째이기 때문이다.
“언니는 지금 바빠. 언니는 지금 과제도 하고 공부도 하고 바쁘니까 너네는 나가서 놀거라. 시끄럽게 하지 말고.”
물론 항상 바쁘지는 않았다. 때로는 바쁜 척하고 싶기도 했다. 나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으니까. 그럴 때면 학업에 열중하는 척하는 첫째를 위해서 엄마와 동생들은 시간과 공간을 보장해줘야 했다. 그리고 그럴 땐 부모님의 심부름이나 집안일에서도 제외였다. 왜냐하면 나 말고도 돌아가면서 할 동생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불만은 나보다는 둘째가 있는 것 같다. 고작 자기와 몇 살 차이 안나는 것 같은데 첫째 장녀라는 이유로 집에서 대접을 받는 것이 꽤나 마음이 들지 않은 모양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어린 동생들이 많으니 시도 때도 없이 동생들이 놀아달라고 귀찮게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동생들끼리 놀면 되기 때문이다. 나를 빼고도 4명이나 있으니 자기들끼리는 팀을 만들고, 개인전도 하면서 서로 번갈아가며 즐겁게 논다. 동생이 1명이나 2명이었으면 나를 귀찮게 하거나 둘이서 놀아도 금방 지루해할 테지만 4명이서 만들 수 있는 경우의 수는 꽤나 많다. 
그래서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자기들끼리 잘 논다. 오히려 동생들이 많으면 나도 게임을 재밌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순위를 계산해서 집안일을 맡아서 하곤 한다. 부모님도 도울 수 있다. 
가위, 바위, 보나 신발 던지기 등 단순한 게임인데도 사람이 많아서인지 더울 재미있었다. 역전할 수 있는 기회도 마련해 줘야 하니 머리도 좀 써가면서 진행해야 한다. 모바일 게임을 할 때도 동생들을 불러서 하면 되기 때문에 팀전이든 쉽게 할 수 있어 좋다. 동생들이 많다 보니 그중 취향이 맞다면 같이 공유하며 게임을 즐길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도움을 요청할 때 손을 내밀어주는 동생들이 4명이나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가끔 무의식적으로 이름을 부르지 않고 “야”라고 부르면 4명이 다 대답한다. 서로 미루지도 않고 4명이서 대답을 잘해준다. 그리고 나의 요청사항도 한명이 다 들어주면 힘드니까 자기들끼리 역할 분담을 하면서 도와줄 때도 많다. 그럴 때마다 내 동생들이 착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나도 동생들을 챙겨주거나 할 일이 있을 때 미루지 않고 도와주게 된다. 
이렇게 서로 도움을 주고 믿음이 계속 되니 가족끼리 좋은 분위기가 생긴다. 자꾸 한 사람에게만 심부름이나 부탁을 시키고 들어주는 과정이 반복되면 불화가 생기겠지만 인원수에 여유가 있다 보니 서로 말과 행동에 여유도 있고 사이도 좋다.
또 동생들의 경우 동생이면서 언니면서 누나인 복잡한 역할을 겸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일방적으로 양보한다거나 일방적으로 양보받지 않는다. 내가 동생에게 양보하면 동생은 양보 받으면서도 자기도 언니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다음 순번에는 나에게 양보한다. 이것은 형제가 많기 때문에 가능한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좋은 이야기만 하니 다툼도, 갈등도 없을 것 같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 그나마 가장 난감할 때가 간식 먹을 때인 것 같다. 치킨이나 피자를 다 같이 나눠먹는 경우 눈치 보느라 바쁘다. 1마리나 1판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2마리나 2판이어도 서로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더욱이 나는 음식을 늦게 먹는 편이어서 조금만 여유를 부리다보면 동생들이 계산 실수로 나의 몫이 부족할 때가 있다. 내가 어렸을 때엔 그 부분이 너무 서러웠다. 그런데 내가 동생들을 이해할 수 있어질 무렵 동생들도 몸과 마음이 자라서 늦게 먹는 나를 위해 남겨 놓을 줄 알게 되었다. 
나는 가족 구성원이 많아 좋은 것 같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동생이 많아서 좋다. 요즘에도 가끔 엄마에게 동생을 더 낳아달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럴 때면 엄마께서 “엄마가 이제는 나이도 있어서 힘들어 안된다”라고 하시거나 “네가 결혼해서 낳는게 더 빠르겠다”라고 웃으며 대답하신다. 나는 진심인데 엄마는 농담인 줄 아셨나보다. 5남매의 첫째로서 말하자면 식구가 많은 우리 집이 참 정답고 즐겁다. 스마트폰도, TV예능도 별다른 모바일 게임도 필요 없다. 그냥 동생들만 있으면 이야기만 나눠도 즐겁고, 간단한 놀이만 해도 금새 웃음소리로 가득하다.
TV, 영화, 드라마처럼 재밌는 줄거리나 에피소드가 없어도 우리 집은 항상 즐겁다. 단순히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오는 따뜻함이 묻어있다. 그래서 나의 4명의 동생들, 우리 5남매가 나에게는 참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