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광지역 한말의병 항쟁과 절의정신 ①
■ 영광지역 한말의병 항쟁과 절의정신 ①
  • 영광21
  • 승인 2023.12.07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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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64명의 일심계 태동 … 대다수가 의병활동 전개
1909년 격렬한 무장투쟁으로 일제에 항쟁 … 영광의병의 보다 높은 가치 조명 필요 

영광문화원(원장 김범무)이 11월29일 <영광지역 한말의병 인물 발굴 학술회의>를 개최해 과거 구한말 영광지역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의병활동과 인물들에 대한 고찰을 실시했다. 강제로 체결된 한일늑약으로 국권을 강탈당한 당시 시대 상황에서 방관자에 머물지 않고 일제를 몰아내고자 끈질긴 투쟁을 전개했지만 한편으로는 잊혀진 역사인물들을 복원해 선열들의 우국충정을 되새기자는 의미에서다.
학술회의는 조선대 이정선 교수를 좌장으로 영광지역 한말의병 항쟁과 절의정신(노기욱 호남의병연구소장)의 기조발표를 시작으로 영광 내륙지역과 연해지역 한말의병 활동(김상욱 박사), 영광지역 한말의병 활동 문헌사료 검토(박용규 전 고려대 교수), 영광지역 한말의병 활동 일본측 사료 검토(전 동경대 연구원), 영광지역 한말의병의 생가와 문화유산 등 4개의 주제발표가 이뤄졌다. 
본지에서는 기조발표된 <영광지역 한말의병 항쟁과 절의정신>의 주요내용을 발췌해 당시 활동했던 의병들을 인물사를 조명해 본다. / 편집자 주

 

 

 

1. 머리말
의병이란 국가가 위난지경에 처하였을 때에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 외적과 전투행위를 하는 군대이다.1 영광지역 백성들은 근세 임란 때에도 왜적의 침략에 맞서 군민 스스로 영광읍성을 지키기 위하여 수성동맹을 결성하였다. 56명의 지도자가 군민과 일심단합하여 정충보국貞忠保國을 실천하였다. 
그런데 1905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하여 강압적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였다. 이어서 일제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이에 영광군민은 의병 참여에 나섰다. 남녀노소 반상을 가리지 않고 국권 회복을 위하여 나섰다. 그리고 우선 일심계一心契라도 만들어 볼 작정이었다. 
1905년 국운이 기운 상황에서 영광군민은 무엇인가라도 방책을 세우려고 고민하였다. 이후 1909년 일제에 맞선 영광의병은 격렬하게 항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일제는 영광의병들의 저항이 영광·법성포 서남해안 일대 진출과 식민지 건설에 걸림돌이라는 인식하에 기병대 40명을 주둔시키고 의병탄압에 혈안이 되었다. 영광의병은 오직 일제타도에 골몰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의병장의 가옥에 불을 지르거나 가족들을 잔인하게 고문하였다. 단재 신채호 선생도 “강도 일본이 우리의 생명을 초개로 보아, 촌락을 소화한다, 재산을 약탈한다, 부녀를 오욕한다, 목을 끊는다, 산 채로 묻는다.”라고 하였다. 
오늘날 군민은 일제에 맞서 끈질긴 무장투쟁으로 일관한 영광의병의 보다 높은 가치와 조명을 요구하고 있다. 의병장 김용구나 의병장 이대극은 영광의병을 나타내는데 부족함이 없다. 
이에 본고에서는 첫째, 1905년 영광군민의 울분에서 1910년까지 일제침략에 맞서 항전한 영광의병의 서훈자와 미서훈자를 추적하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미서훈자의 발굴의 필요성을 제기하기 위함이다. 
이와 관련 자료는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의 자료를 이용할 것이다. 이외에도 <폭도 초무에 관한 편책>, <호남 불령선인 검거록> 등을 비롯하여 ‘한국학 자료플랫트 홈’의 자료를 인용할 것이다. 
둘째, 영광지역 한말 의병들이 남긴 생가와 유물 유적은 무엇이며, 어떻게 보존 활용해야 하는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이러한 검토는 영광의병의 역사문화자원을 조명 발굴하는데 의미를 둔 것이다. 이중에서 의병 관련유물과 의병의 생가, 의병의 활동지와 의병의 길 등에 대하여 콘텐츠화를 모색하고자 한다. 
끝으로 이러한 연구가 진행되도록 학술세미나를 후원하여 주신 영광군, 영광문화원 관계자 여러분과 영광의병장 후손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2. 영광 일심계 결성과 불망조국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란에 처하자 영광의병은 불망조국不忘祖國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것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임란시기 영광군민 모두가 전사적으로 영광읍성을 사수하였듯이,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인 상태에서 군민 모두가 일심으로 주적 일본을 막아 내야했다. 
이러한 점에서 영광의병은 후기 동학농민혁명과도 궤를 함께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영광의병이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는 점에서 발전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영광의병으로 일찍부터 영광 남산 출신 이대극이 대마산大馬山에서 거병하였다. 이어서 김용구도 의병장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외에 영광지역을 무대로 전투를 벌인 의병장으로 김창욱, 이성숙, 김동신, 기삼연, 전해산, 박포대, 이봉수, 이옥빈, 김태수, 조경중 등도 활동하였다. 
1906년 김용구를 주축으로 영광사람 64인이 모여 일심계를 조직한 사례에서 상호 협력을 의병으로 연결시켰다. 이는 일심계원 대다수가 의병이 되었기 때문이다. 
활발하게 진행한 영광의병 활동은 <공훈전자사료관(국가보훈처)>, <한국독립운동사>, <매천야록> , <광복39년사> 등에서 다수가 등장한다. 
일심계의 목적은 나라를 잊지 않고 국권회복을 위하여 정세에 대응할 태세를 갖추어 나가는 것이다. 영광의병은 위난극복 사명과 절의정신으로 실천적 삶을 지향하였다. 
1907년 7월24일 일제는 정미7조약을 만들었다. 그리고 8월1일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8월8일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감지한 영광 일심계원들은 봉기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호남창의군이 되어 의소에서 활약하였다. 8월12일 영광읍성 공략에 나섰다. 일제를 공격할 정도의 기량은 없었지만 이는 의병 전쟁의 본격적인 서막이었다.
1907년 9월23일 고창 문수사에서 유진 중 적이 기습하였다. 결국 일제가 도망가기에 이르렀다. 영광의병의 고창 문수사전투는 영광의병의 승리로 끝났다. 
이어서 재차 10월26일 고창읍성 공격에 나서 영광의병은 일제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영광의병은 200여명에 이를 정도로 군세가 증가되었다. 영광의병은 내륙에서 승리를 확대하여 해안가로 진출하였다. 이는 일본인과 그에 동조하는 세력이 법성포구로 밀려드는 상황을 목도하고 전략목표를 새롭게 설정하였다. 당시 법성포는 조선의 제일가는 조창이었다. 
1907년 12월7일 법성포 공략에 나선 영광의병들은 월산리 산하치에서 매복 중이었다. 11월8일 새벽 김용구가 지휘하는 영광의병은 영광 법성포를 공격하였다. “우리 의병은 날은 추운데 옷이 얇고 양식도 부족하다. 법성포에 쌓여 있는 재물은 곧 왜놈이 쓸 것이다.”라고 하며 강력하게 공격하였다. 
영광의병 약 100명은 먼저 법성포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주재소 및 일본인 가옥 10호를 불사르고 일본인 1명을 죽였다. 한간 1명을 저격하였다. 곧 영광수비대 장교 이하 14명이 몰려 왔다. 
이제 영광의병은 사실상 법성포를 잠시나마 완전 장악한 것이다. 조선의 자본 침탈과 토지 침탈을 획책한 일본인, 그리고 우편취급소, 일본인 건물, 상가, 가옥 모두가 소각 대상이었다. 일시에 일제의 모든 것을 불살라 버렸다. 
11월19일 적들이 두려워하며 영광읍성에서 웅크리고 농성하자 다시 공격하여 3시간여 총격전을 벌였다. 이 기세에 고무되어 무려 수백의 농민이 대거 입대를 희망하였다. 영광의병의 접전은 수시로 이루어졌다. 김용구의 <의소일기>에는 이와 같은 전투 상황을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법성포에는 일제 기마대 40명이 상주하고 있었다. 이제 일제의 경찰과 기병대로 영광의병을 대항하기는 사실상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들은 의병전쟁에서 퇴패하자 군대 동원을 서둘렀다.
영광군 진량면 두호리 출신 김창욱은 1908년 12월20일 정호갑 의진에서 30명의 영광의병을 거느리고 활동하다가, 1909년 7월28일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징역 10년 형을 받고 수감되었다. 
이성숙은 영광군 봉산면 호곡리 출신으로, 박포대 의진에서 활동하다가 1908년 12월20일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7년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이처럼 일제의 탄압이 극심한 실정임에도 영광에서 의병 활동은 활발하게 계속되었다. 그것은 영광의병들의 구성원이 농민과 포수 그리고 보부상들로 인적자원이 충분하였기 때문이다. 영광을 무대로 싸운 대표 의병 활동을 살펴보면 얼마나 다양한 계층이 협력하는지를 알 수 있다.

권택(權澤, 1885-1910) 1908년 3월부터 10월까지 심남일 의병부대에서 모사謀士로 활동했는데, 주로 영광과 남평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1909년 9월25일에 피체되었다. 그를 체포한 일본군은 “경서에 능통하고 담력이 커서 사람들을 잘 다스렸다.”고 평했을 정도이었다. 1910년 4월에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 받고 대구공소원으로 이송되어 그해 7월1일에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86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기삼연(奇參衍, 1859~?)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 군대가 해산을 당하자, 김용구 등과 수연산에서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였다. 기삼연 의병부대는 고창 문수사에서 급습하는 일본군을 격퇴하여 기세를 올리고 고창성을 일시 점령하였다. 
영광으로 진출하여 법성포의 일본군과 일본상인을 공격하고 세곡을 접수하여 군량미를 확보하고 나머지는 주민에게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이후 영광ㆍ장성ㆍ담양 등지를 무대로 수차례 전투를 치르면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기삼연은 의병진을 소규모 부대로 나누어 유격전술을 구사하며 난관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장성 백양사 전투와 담양 금성산성 전투를 겪으면서 기삼연이 지휘하던 의병진은 크게 전력이 손실되고 기삼연은 더 이상 군사 활동을 수행하기 어렵게 되었다. 군권을 김용구에게 이양하였다. 

기우만(奇宇萬, 1846~1916) 참판 기정진의 손자로 가업을 이어받아 문유文儒로 추대 받았다. 1909년 <호남의사열전>을 집필하였다. 기삼연, 고광순, 김봉규, 김용구, 박경래, 전수용, 김영엽, 김익중, 김치곤, 박영건, 정원숙, 성경수 등의 약전을 기술하였다.

김기봉(金基鳳, 1886~1907) 영광 대마 화평에 거주하였으며, 이명은 김기봉金起鳳이다. 김용구의 아들이다. 정미7조약 체결 후 군대해산이 단행되자 김기봉은 부친과 함께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에 참여하였다. 그의 부친은 일찍이 을미의병 때에 기우만의 광산회맹소 의병운동에 기삼연과 함께 의진을 거느리고 참여한 바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부친은 기삼연 의진의 통령統領이 되어 무장, 법성포, 고창, 장성 등지에서 위세를 떨쳤다. 김기봉은 그의 부친을 따라 작전을 수행해 오다가 1907년 12월10일 흥덕 안치전투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봉규(金奉奎, ?~1910) 기삼연이 의병을 일으킬 때 그는 의병 병사층의 모집과 무기의 수집을 도왔다. 기삼연이 군무를 맡기려 했으나 가문이 낮아 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것이라며 사양하였다. 하지만 적세의 정탐과 군량의 수집에 적극 협력하였다. 의병장 기삼연이 순국하자, 박도경과 함께 힘을 합하여 흩어진 의병을 불러 모아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1908년 봄부터 항일전선에 나서서 고창, 부안, 장성, 영광 등지를 무대로 활약하였다. 
일본 군경이 이른 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전개하던 1909년 9월20일 박도경과 함께 피체되었다. 일본의 회유를 물리치고 교수형을 받아 대구에서 순국하였다.

김용구(金容球, 1861~1918) 영광 장성 등 전라도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한말의병장. 호는 후은後隱. 자는 유성有成. 본관은 상산商山. 송사 기우만의 문인. 대마면 화평리에서 출생. 1896년 장성의병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다가 기삼연과 같이 비밀리에 거의 준비를 하였다. 이들이 1907년 10월 장성 수련산에서 기삼연 등과 함께 호남창의회맹소라는 의병부대를 만들었다. 대장 기삼연, 통령 김용구, 선봉 김준, 참모 김엽중 김수봉, 종사 김익중 서석구 전수용 전수용 김치곤 박영건 정원숙 성철수 박도경, 중군 이철형 김봉규, 후군 이남규, 군량 김태수, 총독 백효인, 감기 이영화, 좌익 김창복, 우익, 허경화, 포대 김기순 등으로 지도부를 구성하였다. 
조직한 호남창의회맹소는 전라남도의 의병투쟁을 본격화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통령의 임무를 맡아 일제군경과 맞서 싸우다 아들을 안치전투에서 잃기도 하였다. 그는 호남창의회맹소에 가담하기 직전에 독자적으로 영광읍 공격에 나섰다가 실패한 바 있다. 그 뒤에는 창평의병장 고광순과 힘을 합하기 위해 지리산을 찾았다가 피아골전투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그후 호남창의회맹소가 결성된다는 소식을 듣고서 적극 참여했던 것이다. 
그는 1907년 음력 9월16일 문수사전투, 25일 무장읍성 공격, 26일 고창읍성 등을 점령하였다. 12월7일 밤 10시경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법성포 전투를 치르며 일제타도와 무력투쟁 의지를 다졌다. 음력 12월27일, 담양의 금성산성(추월산성)에서 일본군경과 교전 중 의병장 기삼연이 부상을 당해 종군하기 어렵게 되자 그에게 군무를 위임하였다. 
1908년, 남은 군사를 이끌고 장성으로 이동하여 장성 탑정리전투(음력 1월19일)에서 서로 상당한 타격이 있었다. 그 밖에도 고창 영광 장성 등지를 무대로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음력 4월에 그마저 부상당하였다. 
이에 군권을 박도경에게 위임하고서 그는 장성 백암산으로 은신하며 치료하던 중 경술국치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후사를 도모할 목적으로 금산의 용화산으로 들어가 울분을 달래며 기회를 엿보던 중 고종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1918년 음력 12월21일에 음독 순절하였다. 당시 그가 선택한 길은 매천 황현이나 연재 송병선 선생 등의 절의정신과도 궤를 같이하였다.
의병장 김용구는 호남지역의 한말의병을 본궤도에 오르게 한 뛰어난 의병장 가운데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정부는 그의 공로를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김율(金聿, 1881~1908) 이명은 율律. 호는 청봉靑峰. 본관은 경주. 나주·함평을 비롯한 전라남도 중서부지역에서 활동한 한말의병장. 문평면 갈마지에서 부친 김노학과 모친 장수 황씨 사이에 태어났다. 그는 성재 기삼연의 문인으로서 형 준과 함께 독자적으로 의병을 일으키려다가 기삼연이 주도하는 호남창의회맹소에 참여하였다. 
1907년 11월 이후 전북 고창 무장, 전남 영광, 함평, 법성포, 장성, 나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07년 말을 전후하여 형이 이끄는 의병부대와 분진하여 독자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했는데, ‘호남의소’라 불렀다. 선봉장 문상린, 후군장 윤동순 등과 167명의 명단이 적힌 ‘의병가맹부’가 확인된다. 이들은 주민에 대한 토색을 엄금함으로써 민중의 지지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의병부대의 투쟁역량을 강화하여 장기항전의 기반을 마련한 점에서 주목된다. 일제군경은 1908년 1월부터 강력한 군사작전을 전개했고, 그것도 모자라 특설 제2순사대를 투입하였다. 결국 그는 3월29일 송정읍에서 체포되었다. 
형 준은 1908년 4월25일 어등산에서 순국하자, 시신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피살되었다. 이들 형제 의병장이 순국하자 일제는 경시警示라는 글을 각지에 게시했으나, 당시 민중들은 이들의 죽음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들의 의병항쟁을 흠모한 조경환, 전해산, 심남일, 오성술 등은 항일투쟁을 계속 이어갔다. 그리하여 1908년 후반부터 1909년까지 한말의병의 주무대가 된 것이다. 1995년에야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익중(金益中, 1851~1907)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봉거鳳擧. 장성 출신. 인후의 후손이다. 1896년 의병의 격문이 돌자 포사砲士들을 끌어들여 금성(金城: 현 나주)·광산지역에서 거의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기삼연이 의거를 서두르자 포사와 보부상들이 의병항쟁에 가담하도록 주선하였다. 
1907년 9월 장성에서 기삼연을 대장으로 하는 호남창의회맹소가 결성되자 기삼연은 호남창의회맹소 대장으로 추대되었고, 통령 김용구, 참모에 김엽중 김봉수 그리고 종사에는 김익중을 비롯하여 서석구 전수용 이석용 등으로 구성되었다. 9월23일 고창의 문수사에서 야습해 온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북문루에서 전사하였다. 
1906년부터 1909년까지 4년간 일본 관헌이 전남의병과 전투한 사실을 기술한 <전남폭도사>에도 김익중의 활동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그의 이름이 김익중金益中으로 되어 있다. 1977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김익삼(金益三, 1879~1936) 영광 남면 대덕리 989 사람이다.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이어서 군대가 해산되자 9월에 장성 수련산에서 호남창의회맹소가 결성되고 성재 기삼연을 의병대장으로 하고 김용구가 통령이 되자 그의 휘하에서 무기와 식량의 조달을 책임졌다. 9월3일 고창 문수산전투에 참가하고, 12월10일 흥덕 길마전전투에 김용구의 선봉장으로 참여하여 무동촌에서 적을 살상하였다. 12월27일 호남창의군이 적에게 패하여 기삼연이 체포되고 많은 의병장이 희생되었다. 그 이후 스스로 독립하여 의병장이 되었다. 1909년 8월 고부군에서 체포되어 각각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태원(金泰元, 1870~1908) 일명 준, 태중, 참봉準, 太仲, 參奉. 호는 죽봉竹峯. 아우 율과 함께 1907년 7월 호남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1907년 9월 그는 성재 기삼연이 장성에서 거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친척인 전 참봉 김돈과 의논하여 군사를 이끌고 합세하여 호남창의맹소의 선봉장이 되고 수연산에 있는 석수암과 삼계면 수옥리는 왕녀봉에 주둔하였다. 9월9일 고창에서 김용구와 일본군을 무찔렀다. 10월31일에 무장에 진격하여 적장을 살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7년 12월7일 밤 10시경 법성포에 나아가 적 10여명과 일본인 집 10여채를 불살랐다. 1908년 1월1일 창평의 무동촌에서 의병 토벌에 악명이 높던 길전승삼랑吉田勝三郞을 사살하였다. 
이 전투를 요약하면 음력 섣달 그믐날 창평의 지곡에 도착하여 하루를 쉬고 무동촌으로 진군하던 중 길전의 기마병에게 쫓기게 되었다. 그는 무동촌에 도착하여 자신과 정포 조덕관 외 1명이 돌담 사이에 매복하였다. 길전은 의병의 동태가 조용해지자 망원경으로 근처를 둘러본 다음 말을 타고 마을로 들어왔다. 매복조가 정확히 조준하여 총을 쏘았고, 말에서 떨어지자 조덕관이 생사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달려갔다. 이 때 목숨이 붙어 있던 길전이 권총으로 조덕관을 쏘아 전사하였으며, 그가 달려가 칼로 찔러 죽였다. 
1908년 2월20일에는 장성 토정리에서 적병 50여명을 사상시켰고, 3월초 함평의 나산시장에 진군하여 일본군과 정면으로 충돌 20여명을 살해하고 수십명을 부상시켰으며, 3월20일에는 장성군 남삼면 월암리(현 황룡면 황룡리 월암)에서 6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5시간 동안 교전하여 전중田中, 말연末延을 부상시켰고, 3월21일에 장성군 광곡에서 부하 80여명을 이끌고 잠복활동을 하다가 토벌대의 공격을 받고 암굴에 숨었다가 밤에 탈출하였다. 그후 10여 차례 공격을 받았다. 1908년 4월25일 박산동에서 기병 및 특별순사대로 편성된 토벌대에게 발견되어 교전하다가 오후 4시경 부하 13명과 함께 서봉동 113번지에서 어등산에서 순국하였다. 
일제는 <전남폭도사>에 ‘4월25일 박산동博山洞에서 우리 토벌대와 싸워 드디어 전몰하였다.’라고 하였다. 
노기욱 / 호남의병연구소장